
삶의 긴 시간에서 분명히 고하건대, 우린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에 통달한 인류다.
찬란
공룡은 긴 시간 동안 별을 관측했다. 망원경이라는 것이 나온 이래로 질린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에게 있는 두 개의 시각 기관으로 영원하다고 할 수 있는 우주를 유영하듯
별을 관측하고, 관찰하고, 지켜보며 시간을 쏟았다. 별이라는 건 공룡이 생각하기에 가장 완벽하면서도 불완전했으니까. 이것을 관측하는 순간이 올 때마다 늘 하는 생각일 뿐이다.
그렇지만 지루하고 긴 시간일 뿐이다. 관측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는 것이 있었는데, 그걸 자꾸만 못 찾으니까 문제인거지!
아주 오래 전, 공룡은 빛난다기도 하기도 애매한 푸른 별을 관측했던 적이 있다. 시간 상으로 따져본다면 오 년 전 즈음. 제법 긴 시간이었지만 잊을 수 없는 빛. 새까맣게 타오르는 것처럼
일렁거리는 조각의 편린을 본 순간, 그것에 직접 닿고 싶다는 갈망까지 느낀 덕에 여태 별을 관측하는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행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건 없다고 주장할 때도
그러했고.
똑똑.
이 시간에 도대체 누구야? 투덜거리면서도 몸은 착실히 움직였다. 찾아올 사람이 몇 없는 만큼 누가 문을 두드렸는지에 대해서는 명백했으니까. 해봤자 여태 별 구경 하고 있냐면서 핀잔을 둘 각별이거나, 옆집에 살면서 종종 반찬을 받으러 오는 덕개일 것이다. 둘이 아니라면 올 사람은 더 없었고.
현관문에 붙어있는 작은 창으로 바깥을 보면, 처음 보는 여성이 서 있었다. 시계를 흘끗 보면 새벽 두 시 삼십 분. 모르는 사람의 집으로 찾아오는 건 이상한 사람이거나, 미쳤거나, 살인마다. 셋 다에 속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집을 착각할 리는 없어보일 만큼 좀 멀끔한 사람인데 뭐지? 이상하다. 공룡은 한참이고 문 앞에 서서 숨도 죽이고 사람 없는 척 굴었으나,
똑똑.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눈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필시 문 앞에 있는 상대는 귀신이 아닐 터였다. 그렇기에 더 공포스럽지 않겠는가. 어디선가 읽은 문구에 의하면 가장 무서운 것은 인간이라고 그랬다. 지금 눈 앞의 생명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면, 어째서 제게 왔는가! 그러나 공룡은 다시 들리는 노크 소리에 끝내는 문을 살짝 열어서 상대를
마주했다.
갈색의 긴 머리카락에 새파란 눈. 외국인인가? 파란 눈은 보기에 어려운데. 감정이라고는 크게 안 느껴지는 무감한 낯. 옷은 솔직히 말하면 외국인처럼 보인다 주장하기도 애매했다.
우주복? 아니, 그것보다는 연구하는 자들의 옷이라고 칭할 수 있겠다. 미묘하게 화려한 듯 싶으면서도 이름을 적는 위치인 심장 부근은 비어있다. 누구인지도 영 모르겠고 같이 일을 했던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싶어서 상대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으니 시원스레 웃음이 돌아온다.
“저는 잠뜰입니다.”
“아, 네···. 잠뜰님? 죄송한데 저희 집에는 어쩐 일이시죠? 그것도 이렇게 늦은 시간에 오시는 건 아무래도 예의가 좀···. 하하.”
“이 시간이 아니면 제가 기억을 제대로 못 해서요. 우선 드릴 말씀이 있는데, 시간 괜찮으신가요?”
“안 괜찮다고 하면 다시 돌아가시나요?”
“그건 아니긴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말씀하세요.”
선택권이 없지 않나? 보통 예의가 없이 찾아온 것들은 다 이런 모양인가? 공룡은 여러 가지 의미로 억울해졌다. 아무리 잠뜰이라는 사람이 세계를 바꿀 수 있을 정도의 무언가가 있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억울해질 수밖에 없음을 알아주었으면 했다만··· 이런 시간에 멋대로 들어오는 사람에게 무얼 바라겠는가 싶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그냥 바깥에 세워두기만 하는 것도 영 못할 짓이라, 공룡은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오라는 듯 고갯짓을 하자, 익숙한 듯 들어오는게 제법 괘씸하기도 해서 시선이
곱게 가지를 못했다.
집 안은 깨끗했다. 별을 관측하기 위해 전부 꺼 두었던 불을 켜고 나서야 집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애초에 불도 안 켜진 집을 왜 찾아왔지? 그리고 본인을 알고 있는 것도 이상했다. 수상한 사람을 집 안에 들이고 나서야 본인이 너무 조심성이 없었음을 자각했다. 아, 조금 더 생각을 해 보고 살 걸. 너무 멋대로 사는 것이 익숙해진 나머지 이런 일들 마저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게 문제였나. 공룡은 십 초 정도 자신의 안일함을 반성했다.
앉을 수 있는 곳에 앉으라며 말 꺼내기도 전에 식탁 의자 꺼내서 앉는 것이··· 남의 집에 이렇게 멋대로 들어온 게 한 번 있던 일은 아닌 건가? 싶어서 진짜 더 수상하게만 보였다. 집에 있던 물이라도 한 잔 꺼내서 상대 앞에 놓아주고, 본인도 들고 있다가 마주보는 방향으로 앉고선 공룡은 이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기까지 해서, 상대가 입 열기를 기다렸다.
“저는 인류 최후의 보루인 남극의 과학부 장관. 잠뜰입니다.”
“······ 죄송한데 남극에서 여기까지는 왜 오셨어요?”
“새로운 세계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 이야기가 긴데 좀 들어주시겠어요?”
“그래요 뭐, 어차피 안 들으면 돌아가지도 않을 것 같고. 해 보세요.”
이어지는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다. 스페이스 스테이션이라는 거대한 공간을 만들어서 모든 인류가 그 안에 모여있다고 하지를 않나, 인류가 대다수 멸절한 덕에 남극에 있는 인원을
제외하면 남아있지 않다고 하지를 않나.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가히 충격적이라서 공룡은 사실 안 믿는 편에 속했다. 미쳤다고 이 이야기들을 얌전히 듣고만 있겠는가. 들으면서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은 중간에 인내심 있게 참다가도 손을 들고서 질문했다.
“잠깐만요. 그러니까 장관님 말씀으로는 인류가 폭망했는데 살 곳이 남극밖에 없을 정도로 뜨거워져서 타임 스테이션이라는 걸 만드셨고······.”
“네, 맞아요.”
“그 타임 스테이션에서 시간을 돌려서 이전의 과거를 바꾸기 위해 뭔가를 하셨는데 설정 미스가 있어서 지금 제가 있는 곳으로 오셨다고요?”
정확한 요약이라면서 시원스레 웃는 모습을 보면서도 공룡은 머리를 쥐어 뜯을 수밖에 없긴 했다. 지구가 뜨거워지는 건 그저 지구 온난화라고만 생각했더니 이게 뭐지? 물론 최근 뉴스에 따르면 점점 미확인 물체가 가깝게 다가온다는 말이 들리긴 했다. 어떻게 해결하지도 못하고 궤도도 일정해서 공룡도 의도치 않게 한 번 관측한 적이 있었는데, 정말 정확하게 지구를 향해 오는 궤도인 탓에 확실하게 얼마 지나지 않아 인류의 멸절을 예감하기도 했고.
그렇다고 해서 시간을 되돌릴 필요가 있는가, 하면 공룡은 아직은 모르겠다며 굴 생각이긴 했다. 그야 당연하게도, 저것이 직격타로 오기 위해서 아직 오십 년은 더 기다려야 할 예정인데
공룡은 그 전에 본인이 늙어서 죽을 것이라는 걸 직감했으니까. 본인이 사망한 이후의 시대에 태어난 인류같은데 그렇다면 도와줄 필요가 있나? 어차피 인류는 다 망했고, 네가 마지막이
될 터인데. 도와줄 필요가 있나 싶어 의아하게 바라보면서도 괜스레 나쁜 말을 얹지는 못했다. 순전히 선의로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지 않나.
그런데 이상하지.
공룡은 단 한 번도 본인이 미래 인류에 도움이 되는 직업이라고 한 적이 없었고, 나이가 먹고서도 그런 부류의 직종에 종사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무엇을 도와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이러한 본인에게 도와달라고 한다? 무언가 확실히 이상했다. 도와줄 수 있는 것이 당장은 한정적인데. 제일 잘 하는 건 행성이나 항성, 혜성 또는 위성의 궤도 계산 말고는 제대로 할 줄 아는게 없긴 했다. 그런 것들을 도와달라고 하는 건 아닐테고. 이미 미래에서는 본인보다 더 잘 계산할 줄 아는 인류들이 넘쳐날 테니까.
공룡의 이런 생각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눈 앞의 잠뜰이라는 사람은 그저 은은하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듯 공룡은 한참이고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립했다. 이걸 지금 도와준다고 해서 본인에게 큰 도움이 될까 싶어서. 그리고 일단 이런 새벽에 왔다는 것 부터가 이상하지 않나. 본인 집을 정확하게 찾아온 것도 그렇고.
“그런데 제 집은, 저는 도대체 어떻게 찾아오셨죠? 제가 나중에는 미래나 인류를 위해서 엄청난 역할을 수행하는··· 그런 멋진 사람이 되었나요?”
“아니요.”
단칼에 부정하네.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시선이 이어진다. 닿아오는 시선에 호의가 없음을 알면서도 잠뜰은 당당하게 군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한 번이 아니라는 듯.
······ 아니, 잠깐만. 타임 스테이션이 어떻게 굴러간다고 했었지?
들었던 기억을 복기시키듯 돌려본다. 과거로 돌아가서 그것을 바꾼다. 그러나 잠뜰이라는 이 사람이 아무리 머리가 좋고 수많은 가정을 해서 최고의 결론에 도달하려고 했다 하더라도,
모든 상황에서 성공했을 리가 없다. 과거를 바꾼다는 것은 그만큼 까다로운 일이니까. 공룡, 본인이 살고 있는 시간선으로 왔다는 것이 성공인지 아닌지도 모를 일인데도 왔다는 것을 보면 이것은 과연 성공이라고 할 수 있는 여행인가. 그리고 본인의 기억을 일부러 지우고 다닌다고 했는데 지금 설명하는 것을 보면 완벽하게 기억하는 모양새다. 그렇다면 지금의 당신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
수많은 물음을 삼키고 공룡이 내뱉은 문장은 딱 하나였다.
“어떻게 지금은 기억을 가지고 있으신 거죠?”
잠뜰은 그 질문을 듣고서야 웃던 것을 멈추었다. 마치 그래서는 안 되는 사람처럼. 미소가 사라진 낯은 제법 외롭게 보이기까지 해서, 공룡마저도 더 따지려던 것을 멈췄다. 말을 하지는
않았어도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지 않은가.
지금 이 시간선은 완전히 실패해서 넘어온 것이다. 잠뜰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인류의 존망을 걸고 다닌다더니, 거짓이 아닌 모양이지. 공룡은 이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쉽게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도통 알 수가 없긴 했다. 눈 앞의 상대가 말한 것 만으로
어떻게 믿고 대하겠는가. 당연하다는 듯 의심이 싹을 트고 올랐다. 그런 공룡의 상태를 아는 것인지, 잠뜰은 길게 한숨을 한 번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 시간을 돌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류가··· 그걸 당신에게 요구했던 적이 있으신가요?”
“그런 적은 없지만, 남아있는 모두가 저를 믿고 있긴 했죠. 제가 장관이니까.”
“······ 그렇다면 결국 어쩔 수 없이 시작하셨다는 거 아닌가요?”
새벽에 제 아늑한 보금자리를 빼앗긴 탓에 말이 사납게 나가는 공룡을 보면서도 잠뜰은 표정을 곱게 할 생각이 없는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새벽에 가라앉은 침묵은 차가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겁지는 않았다. 그 누구도 피곤하지 않은 채로 제정신을 유지하는 지금. 이번에는 공룡이 한숨을 내쉰다.
“그렇다면 잠뜰님 말로는 지구가 이미 충분히 위험하다는 건데, 제가 어떻게 도와드릴 수 있죠? 그 말씀 대로라면 이 세계도 곧 망한다는 건데··· 포기하셔도 되는 거 아닌가요?
이미 실패한 세계에 이렇게까지 집착하실 이유는 없잖아요. 아무리 당신의 세계라지만.”
“······.”
“제 말이 틀린 것도 아니고, 잠뜰님이 그렇게 살리고 싶은 세계라면 여기서 저한테 이런 얘기를 하고 있으실게 아니라 당신의 세계를 살리기 위해서 다른 방법을 좀 찾아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말이 한 번 트이기 시작하면 계속 말하는 아이처럼 물꼬를 트기 시작한 말은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애초에 이런 고민을 왜 제가 해야 하지? 걱정해야 하는 건 상대인데! 공룡은 그제야
울해져서는 말을 다시 토해내듯 주장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잠뜰님이 이렇게 희생하듯 구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다고요. 당장 당신이 사는 세계가 곧 망한다는 것도 알고 있는데! 그럼 여기서 뭘 고쳐보려는 시도를 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
“저는 진짜 모르겠어요. 아니, 잠깐만. 잠뜰님이 아는 제가 도대체 뭐라고 말했길래 저에게 오신 거예요?”
그 질문을 듣고서야 미동도 없던 잠뜰이 입고 있던 특이한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을 빼내서 나오는 것은 작은 쪽지. 식탁 위에 얹어지면 공룡이 낚아채듯 가져가서 펼친다.
한 번, 두 번 접어진 것을 확인하기라도 하듯 열어보면···.
아. 공룡은 기어코 탄식했다.
본인의 글씨체로 쓰여진 딱 한 문장.
‘무슨 일이 있어도 말하는 모든 것을 믿고 전력으로 도와줄 것.’
“이제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제 글씨체로 쓰여진 건데 어떻게 못 믿을까요···. 알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뭘 도와드려야 한다고요? 아까 전부터 계속 여쭤봤는데 답이 없으시길래요.”
“그걸 보여드리기 전까지 안 믿으실 것 같아서 기다렸죠.”
“제가 홧병이라도 나길 기대하신 건 아니죠?”
“그럴리가요. 그저 감정이 가장 고조되었을 때를 기다린 것 뿐입니다. 이제 대화가 될 것 같으니 다시 말을 이어가겠습니다.”
“······.”
“제 소개를 다시 할 필요는 없겠죠. 저는 제가 머무른 세계가 필연적으로 문제가 생김을 알고 있기에 다시 과거로 되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래서 더 이전의 과거로 돌아가고 그것을 몇
번이고 거듭했는데도 해결책을 얻지 못했어요.”
“··· 계속하시죠.”
“그래서 저는 얼마나 더 과거로 돌아가야 할지에 대해 조언을 구하고 싶습니다.”
시간 이동은 공룡의 전공이 아니다. 가끔 그러한 가설들이 궁금해서 책을 읽어본다거나 하는 일은 있었지만, 아쉽게도 이번에는 그런 단순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 같았고.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분명 아주 먼 과거까지 돌아간게 분명함에도 여전히 해결책을 얻지 못한 모양새인 듯 싶었다. 미래의 저는 도대체 어떻게 굴었길래 이런 안배를 마련하기라도 하듯 군 거지?
그러나 대답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밖에 없었다. 수많은 가설들은 이미 잠뜰이 알고 있을 터였으니 공룡이 대답할 수 있는, 잠뜰이 할 수 없는 가설을 내뱉는다.
“답은 간단한 것 같은데요? 물론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지만···.”
“이걸 듣기만 했는데도 아신다는 건가요? 뭡니까?”
“··· 그런데 영 말해주기 싫어요!”
잠뜰이 의아하다는 듯 시선이 닿았음에도 불구하고 공룡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제가 여태 말했던 일장연설을 왜 했겠는가. 아무도 시키지 않은 것에 자기희생을 하는게 안타까워서 그러지
말라고 말을 했는데, 제가 해결책을 말한다면 그것에 대한 부작용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듣지도 않고 냅다 시행하기라도 할 것 같아서. 이유도 없는 희생은 아무리 잘 모르는
사람이어도 께름칙했다. 새벽에 도움을 요구하기 위해 요청하는 놈이니까.
그러나 대답하지 않으면 영원히 여기에 있기라도 할 모양새인 사람을 두고 영원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순 없긴 했다. 아, 곤란한데···. 이미 친한 척을 안 하고 돌이킬 수도 없고. 결국 느리게 입을 연다.
“방법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걸 알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데 괜찮으세요? 그러니까, 당신이 희생하게 되는 게 확정이라고요. 몇 번 시간을 돌이킨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딱히 상관 없는 부분입니다. 애초에 모든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제가 있는 걸요.”
공룡은 그제야 결심한 듯 잠뜰을 똑바로 응시했다. 새파란 눈. 올곧은 방향을 위해 나아가는 그 시선을 이길 재간이 없었으니까. 이래서 정의로운 사람들에게 잘못 걸리면 안 된다는 건데. 미래의 본인은 도대체 왜 저런 애한테 잘못 걸려서 이런 쪽지나 남겨두는 거지? 새삼스럽게 억울해졌다.
“아무튼··· 시간을 거듭하며 지내시면서 잠뜰님이 속하신 세계를 살릴 수 없다고 하셨죠?”
“네, 맞습니다.”
“그렇다면 시원하게 버리면 됩니다.”
공룡의 대답을 듣고 잠뜰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의중을 모르겠다는 듯. 그래도 한 번은 믿어보기로 한 건지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듯 굴었다.
“그냥 무턱대고 버리는게 아니라··· 당신의 세계를 살리는 건 어려울 테니 당신을 대신할 여행자를 하나 만들어보죠.”
“······.”
“그 여행자가 당신의 발자취를 걸을 수 있게 어느 정도 정해둔 안배를 미리 만드는거죠. 어느 정도 가설을 세운게 있을 거 아니에요? 어떤 것들을 바꿔야 새로운 세계를 지키는데 쓸 수 있을지.”
“······.”
“새로운 여행자에게 그걸 맡기고 당신이 사는 세계는 어느 정도 포기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모든 걸 얻을 순 없잖아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건 미친 짓이라는 거 알고 있지
않아요?”
공룡의 말이 다 끝나도 잠뜰은 한참을 고민하듯 말이 없었다. 어떤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룡은 굳이 말을 얹지 않고선 이 침묵이 깨지기를 기다리며 물을
느리게 들이킨다. 잠뜰이 고민할 시간이라도 주듯 먼저 일어나서는 하품 한 번 한다. 생각이 많아진 모양이지? 물론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이 본인임을 알면서도 제법 뻔뻔스럽게 굴었다.
애초에 이걸 시행할 생각도 없었으면 찾아오지 말던가. 이 새벽에 사람 피곤하게 왜 찾아오는 거야!
속으로 불만을 토로하는 공룡이 꿍시렁 대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잠뜰은 한참 말이 없다가 물을 한번에 들이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멍하니 하늘의 별이라도 세려는 듯 창 밖을 보던 공룡이 그제야 시선을 잠뜰에게로 이동했다.
“결심은 하셨어요?”
“조언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해요.”
“에이, 뭘요. 더 나은 지구가 될 수 있었다면 영광이긴 합니다. 그래도 너무 희생하려고만 하지는 마시고요. 제 말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을 수 있으니까 어디까지나 살짝 들어가는 조언
정도로 봐 주시면 좋겠네요.”
이런 말 하나로 저 역시 책임을 지고 싶진 않았다. 잠뜰은 그런 공룡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감 있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공룡씨가 책임질 일은 없을 겁니다. 전부 제가 책임질 수 있는 선에서 해결할 거라서요.”
“······.”
“우리가 만났던 현실도 사라질 수 있겠지만, 새로운 세계에서 함께할 수 있길 바라겠습니다.”
잠뜰의 말이 끝나는 순간, 잠시 아무도 말하지 않는 침묵이 이어졌다. 이후 눈 깜빡이는 사이 사라졌고. 사람이 사라지는 건 이렇게 순간이었나. 아무래도 본인 자체가 시간을 되돌리다가
온 모양새이니 그럴만도 했다. 무리가 갔겠지. 공룡은 멍하니 허공을 보면서 제가 꿈이라도 꿨나, 하고 눈을 비비다가 몸을 다시 일으켜서는 집 안의 모든 불을 껐다.
고요할 정도로 다시 차가운 공기가 가라앉은 새벽. 세 시가 조금 넘은 시간. 비일상을 관측한 이후에도 공룡이 할 일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전에 확인했던 것을 다시 보고자 하는 것.
궁금한 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공룡의 가장 큰 장점이지 않나! 조금 피곤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 볼지도 모르는데 회피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망원경에 눈을 대고, 찬란히 빛나는 허공을 뒤지듯 별을 관측했다.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가장 찬란한 것. 이 순간을 기다리는 것만이 하루에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순간이라고 여겨지기까지 했으니까.
새까만 하늘에 수놓아진 별들. 익숙한 것들의 궤적을 따라 망원경을 조절하다보면, 공룡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하게 가라앉은 것처럼 빛이 꺼지는 모양새가 눈에 띄는 별을 관측했다.
아니, 이건 별이 맞나? 시야에 닿는 것은 새파란 것의 무언가. 직접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닌 것 같은 모양이 드는 것. 달 같은 위성일까? 생각하다 보면 끝내 오늘 있던 일이 생각난다.
타임 스테이션.
그러니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진짜 실재한다고? 그러나 이렇게 생긴 위성이나 항성, 또는 혜성 같은 것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거 말고 다른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여태 찾고자 헤맸던 것의 끝을 오늘 알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밖에 안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룡은 납득했다. 여태 제가 못 찾은 이유가 이것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새로운 세계를 찾았나보다, 하고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제 제안이 여러모로 도움이 된
모양이지.
어떤 여행자가 여행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공룡은 모든 여행을 응원해주기로 했다. 그야 당연하게도, 책임지고 싶지 않다 했으나 내뱉은 말이 어떤 형태로 돌아올지 몰랐으니까.
공룡도 결국은 모든 인류의 안배가 온전히 마련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