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아트워크. 성인. 2인.
수현아 너 전시회 가 봤어? 카페에서 음료 두 잔을 사고 나오는 길이었다. 정형준은 항상 아인슈페너였으니 그날도 그랬을 것이고. 난 딸기라떼였나. 사람 많은 버스에 간신히 몸을 욱여넣고 빨대를 쪽 빨아먹었다. 그럴 리가. 이어서 고삼이 뭔 전시회야. 라고 말하려던 찰나, 교차로에서 한 카니발이 갑자기 끼어들고. 경쾌한 클락션 소리에 버스 기사의 욕 한 사발이 뒤 따랐다. 그럼 같이 가자. 아, 방심했다.
뭐라고 핑계대 볼 시간도 없이 정신 차려보니 손에 들린 건 티켓 한 장이었고 눈앞은 그새 대학교 입구였다. 저 앞에서 신난다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형준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여튼 이상한 거에 꽂히기 장인이었다. 그래놓고 항상 공부는 나보다 잘하던 게 제일 꼴 보기 싫고. 이번 시험 망치면 또 쟤 때문이라고 뭐라 할 테다. 매점이라도 쏘라고 해야지.
황수현 빨리 안 오냐? 그제야 시선을 앞으로 돌리니 벌써 건물 코 앞에 다다른 형준이었다. 재촉하는 것도 타고나셨어요 아주. 형준은 문고리에 휘청이며 아슬하게 걸려있는 신문 뭉텅이를 집었다. 답지 않게 그 잠깐 동안에 신문을 읽다니. 하여튼 오늘 이상한 마가 낀 게 틀림없었다. 너 도선그룹 손자였어? 그걸 이제 알았냐. 무심한 대답 후에 형준이 펼쳐보았던 신문 뭉텅이 속 한 부를 낚아챘다. XX년 8월 호. 익숙한 날짜 밑에 대문짝만 하게 실려있는 하나의 그림. 우주비행사처럼 보이는 인영이 달을 향해 발을 뻗고 있었다. 꽤나 광활한 우주의 형상이 자연히 경외감을 불러왔다. 기억의 저편에서 익숙하다고 소리쳤다. 마치 제 주인을 찾은 듯한 비명. 이건 분명,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슬러시니스
적어도 너는 잊지 말았어야지.
“넌 유복하게 자라서 좋겠다.”
귀에 딱지가 눌어붙도록 들은 말. 부잣집 도련님이라 사랑 한가득 받고 자라기는 무슨. 현실은 엄격하고, 깐깐하고, 그리고는… 거는 기대가 크고. 바쁘다는 핑계로 가정에 소홀한 부모 밑에서 대한민국 1티어 로펌 회장의 유일한 손자로 살아가는 건 아무래도 지옥이었다. 누가 인생은 개척하는 것이랬나. 인생 루트는 이미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것처럼 굴었고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순응하는 것 하나였는데.
그러니까 하나였어야 했다. 그 누가 도선그룹 손자한테 예상에 없던 재능이 있다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집안 가계도를 눈 씻고 헤집어봐도 건덕지 하나 보이지 않을 천부적인 미감. 전산 오류로 나가게 된 전국 단위 미술 공모전에서 당당히 대상을 타와 신문 1면을 장식한 것을 보고는 회장은 기가 차 웃었다. 내 손자 아니랄까 봐 화제성은 타고났네.
그게 고작 여덟 살 때의 일이었고. 이제는 각종 포털 사이트에 황수현 이름 세 글자 검색하면 로펌보다 공모전이 연관 검색어에 떴다. 것도 그럴 것이 단순한 수상이 아니라 현직 업계에서도 인정해 주는 명망 있는 대회라나 뭐라나. 더군다나 그룹의 유일한 후계라는 사실 또한 언론에 의해 까발려졌으니 말 다했지 뭐. 저 실력이면 미술계에서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니냐느니. 그룹 후계 싸움 볼 만하겠다느니. 말 얹기 좋아하는 대중들의 댓글 하나하나가 모여 커다란 스노우볼을 만들었다. 그야말로 구설수 하나 없이 정상 위치를 고고히 지키던 일류 로펌의 유일한 오점.
“저는 미술 하고 싶어요.”
덧붙여진 급작스러운 선언까지. 완벽한 선로 이탈이었다.
“정 그렇다면 한 번 더 증명해 봐.”
기꺼이 가업을 이어받지 않을 정도로. 여전히 회장은 비웃는 듯한 말투였다. 어린아이가 혼자서 무얼 할 수 있겠냐는. 애써 어른들이 가꿔 온 커다랗고 새까만 우산 없이는 너는 그저 우연히 새어 나온 빛에 다가간 것뿐이라고. 비열한 저 웃음은 평소 바람도 잘 들어오지 않았던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아무리 제가 어렸어도 기분 나쁜 잡음은 뚜렷하게 남았다.
그래서 더 보여주고 싶었을까. 어린아이가 혼자서 무엇마저 할 수 있는 지를. 애써 어른들이 가꿔 온 새까만 우산 위에 생기를 머금은 새파란 잎사귀를 올려놓는. 우연히 새어 나온 빛을 한가득 머금는. 그런 비일상적인, 아니 일상이 될 이야기의 초입을 순수히 웃으면서 건네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뭐. 아니라면 순순히 내려놓을 생각이었고.
“그만해라 이제.”
“네?”
“너도 알잖아.”
고작 반짝하는 경험이었다는 거. 네가 틀렸다고 당당히 내밀었던 신문은 곧바로 찢어졌다. 분명 표지를 장식한 건 다른 사람의 그림이었고 애초에 실린 글자에서 황수현이라는 이름 자체는 거론되지도 않았다. 다시는 들여다보기도 싫어 따로 찾아보지도 않았고. 그렇게 로펌의 후계자로 자리 잡기 직전에 마주한 진실이라니. 이처럼 암담한 건 또 뭔가. 회장의 비열한 웃음은 여전히 입가에 씁쓸하게 남았다.
아, 아무것도 몰랐던 순수한 어린아이여. 그깟 회사가 뭐라고 인간의 감성은 매번 무참히 배제되었다. 예외는 없었으나 그럼에도 당장 돌아가 다 때려치우겠다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떼쓰는 걸로는 통하지 않는다는 건 이 빌어먹을 집안에서 제일 먼저 알려 준 것이었으니까. 애초부터 제 심정을 귀 기울여 들어봐 줄 사람이라곤 하나 없었고 잠시 들어주더라도 바뀌는 건 없었다. 여덟 살 꼬마한테서 간이고 쓸개고 다 가져간 사람들이 뭔들 못하겠어.
그렇다면 더 이상은 적어도 집안의 도움 따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좋아서 죽는 돈과 명예로 꾸역꾸역 액자 테두리 안에 인물을 그려 넣을 사람들. 비운하게도 작품의 주인공은 저였고. 아무리 성적을 꼬라박고 한 줄로 줄 세워도 이 빌어먹을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안 되는 건 없었다. 곧 죽어도 집안이 원하는 대학 심지어는 과까지 전부 정해진 채로 저항할 틈도 없이 진학을 하게 될 터였고. 순순히 쟤네 집 부자라서 그래하곤 수군대는 이들의 술 안줏거리가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까..
“미쳤다.”
“뭐?”
“내가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그려 본 풍경이야.”
정확해. 또 하나의 예외가 들이닥쳤다. 시작은 형준이 전학을 온 첫날. 유난히 주변은 조용했고 새들은 하늘로 날아오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찰나 관심은 금세 복도로 흩어졌고 네가 반장이니 잘 챙겨주라는 말에 건성으로 답한 후였다. 네가 반장이야? 응. 이어지는 말도 그저 형식이란 틀에 갇혀있는 인사. 드라마나 영화에서 쉽게 볼 법한 주인공들의 첫 만남과는 확연히 달랐다. 너는 전학생이고 나는 반장이니까 오늘만 얽히자는 무언의 합의.
후에 생각해 봐도 왜 그렇게까지 건성으로 답했는가에 대해서는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별다를 것 없었고 단연코 형준이 특출 나게 뛰어나보였다든가 하는 감상도 심지어는 그 반대도 아니었다. 아마 평범해 보였고 마침 상대도 그랬을 것이다. 굳이 하나하나 알려주지 않아도 다니다 보면 알게 되겠지. 언짢은 호의를 거절하는 건 무례인가 배려인가. 깊게 고민해 볼 필요는 없었고.
너도 별 보는 거 좋아해? 아니. 서로 배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이 통했을지도 몰랐다. 새로운 기준을 세워보려는 인류와 정해진 기준의 깊이를 확장하려는 인류. 그럼 왜 여기 있어? 지금 말고 살면서 더 이상 하늘 볼 일은 없을 것 같아서. 열망에 사로잡힌 인물과 열망을 삼키려는 인물. 과연 정반대 인물의 등장이라는 건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수현아.”
“응.”
“난 달에 가고 싶어.”
왜? 분명 형준을 처음 만났던 일주일 전만 해도 서로의 인생에서 지나가는 행인 하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애초부터 하늘을 올려다본 것도 오랜만인데 더군다나 달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달에 가고 싶다니. 지구로도 충분히 이 세상은 이미 다이나믹한데. 나도 모르게 작게 웃음이 나왔다. 의미는 알 수 없었고. 내면에 자리하고 있던 두 개의 문 위로 새로운 문이 하나 생기는 순간.
“달을 향해 힘껏 뻗은 발.”
인생에서 처음으로 예외라는 것이 들이닥쳐 온 시기. 한껏 과장된 발자국. 앞에서는 지구도 태양도 그저 작아 보이는. 주어진 길에 이정표도 세워지지 않았을 어린 영혼이 안내하던 하나의 길. 그곳에 분명 정형준은 눈앞에 펼쳐진 경외에 존경을 표하는 중이었다. 너는 일찍이도 이 광활함을 알면서도 고개를 돌렸다니.
“어쩐지 매번 진심이 아닌 것 같더라.”
“내가 보는 넌 평범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거든.”
*
티 안 나게 연습 째는 법.
뭐 하냐. 눈 깜짝할 사이 수현의 핸드폰이 가볍게 주인의 손을 떠났다. 인터넷에 물어보면 누가 답이라도 해준대? 저 멀리에 누워 흥미롭다는 듯 웃고 있는 형준을 보고 있자니 어이가 없었다. 누나 제발. 쉬었으면 빨리 하기나 해라. 축제 이틀 전이었고. 이 찬란하고 파란만장한 시기에 허구한 날 응원단실에 콕 박혀서 몸 굴리고 있는 처지라니. 내가 왜 이걸 한다고 했지.
“뭐긴 뭐야 정형준 저 자식 때문이지.”
“최종적으로 동의한 건 너고.”
그랬다. 입시로 둘이 미쳐있던 시간이 어제 같은데 지독한 악연인 지 환상의 인연인 지는 모르겠으나 같은 대학교에 응원단까지. 형준이 그렇게 가고 싶어했던 천문우주학과를 결국 성적을 낮추면서까지 들어간 것을 보고 수현은 가끔 부러워했다.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과 또 당당히 나아갈 수 있는 배경을. 당연하게도 수현은 법학과였고 결코 외부의 힘을 빌리지는 않았다.
그런 그가 놀랐던 것은 무엇에 홀렸는지 형준이 입학하자마자 같이 응원단을 들어가자고 매일 노래를 부른 점이었다. 당시에는 응원단이 뭐길래 그렇게까지 하나 싶을 정도로. 진심이야? 응. 이것도 꿈의 연장선인가. 재밌을 것 같아서. 아, 형준은 항상 그런 사람이었다. 뭐 가끔은 놀랍게도 진지하고, 가끔은 단순하게도 괴짜 같았지만. 무엇보다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 그게 디폴트값이었다.
그렇지만 재미와 장난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려준 것도 형준이었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내지는 무언가를 동경한다고 말하는 두 눈동자는 항상 빛을 담아 반짝거렸으니까. 그게 가끔 저 멀리 웬만해서는 잡을 수 없는 허영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허영이라고? 아니 당연히 너는 할 수 있지. 그치. 물론 수현의 생각에서.
뭐 그걸 동의한 것도 나긴 하지. 형준의 말 한마디에 응원단에 들어간 것. 이만큼 대학 생활 잘 즐기는 사람도 없을 만큼 나름 희열도 있었고. 이 끝도 없는 네버엔딩 연습지옥만 빼면 꽤나 완벽했다. 그만 수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가로로 고개 저었다. 눈치 없이 햇살은 따스했고. 더 시간 끌었다가는 둘 다 슬기한테 강제 연행 엔딩날 게 뻔해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켰다.
세 시간이나 더 지났던가. 어느새 해는 자취를 감춘 후였다. 수현과 형준이 몸을 욱여넣어보기도 전에 버스는 매정하게 떠났고.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음 버스 38분 후라며 반짝이는 전광판을 보고선 헛웃음 친다. 서로 지쳐 핸드폰 화면만 간신히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도 도로에는 쌩쌩 달리는 차들로 가득했다. 과거형이었고.
분명 도로에만 차로 가득했어야 했다. 수현은 정류장 의자에 앉아있었고 형준은 의자가 널널하게 비어있음에도 재차 마다하고 서 있던 중이었다. 찰나 몽롱했다. 시선이 닿는 곳은 전부 파란 트럭으로 가득 찼다. 아, 두 사람분의 외마디 비명은 재빠르게 거리로 흩어졌고 무언가 푹신한 감각이 뒤따랐다. 눈앞이 아득하다. 잠이 몰려온다. 의식을 붙잡는다. 실패. 가볍게 손아귀를 빠져나와 주위를 유영한다. 이어져 온 침묵을 깬 누군가의 다급한 숨소리가 들린다. 거슬리는 반복적인 기계음이 들린다. 여러 비명이 뒤섞이고.
의식을 잃었다.
다시 수현이 눈을 뜬 건 새하얀 방 한가운데였다. 의식 돌아오셨으면 조만간 퇴원하셔도 되겠네요. 감사합니다. 잠시 주위를 에워쌌던 의료진이 나가고 수현은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왜 나는 병원에 있는 거며 의식은 또 뭔 소리고. 바로 옆에서는 한숨만이 공기를 가득 채웠다. 누나. 어떻게 된 일이에요. 하나도 기억 안 나나 보네.
“너 사고당해서 한동안 의식불명이었어.”
“이 주 됐나.“
운전자 과실 100. 너 회복한 건 기적이고. 슬기는 항상 그랬듯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으나 평소와는 사뭇 다르다는 걸 알아차리는 건 쉬웠다. 걱정이겠지. 일상으로 복귀할 때 연락해라. 무어라 더 물어볼 찰나도 없이 슬기는 자리를 떠났다. 형준이는.. 안 봐도 회복하고 있을 것이다. 살짝 떠오르는 것으로 회상해 봐도 형준은 위험한 위치였기에. 가까스로 정면은 피한 자신에 비해 형준은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냈을 터였다.
계속 누워만 있는 것도 일이네. 24시간을 회복에만 전념한 끝에 수현은 예정보다 빠르게 퇴원했다. 밀린 연락을 한 번에 답장하다 보니 후반에는 화면을 쳐다보는 것마저 진절머리 날 것 같았고. 형준을 다시 만난 건 응원단실. 육안 상 별 문제는 보이지 않아 서로 알아서 잘 회복했겠거니 하고는 굳이 사고에 대해서 말 섞지는 않았다. 삶에 대한 가치관은 정 반대지만 이런 부분에서는 또 잘 맞았다. 그러니까 매번 싸우면서도 친구하고 있는 거겠지.
오늘 퇴원했는데 뭔 연습이냐며 그냥 너는 여기서 쉬고 있으라는 슬기의 말에 둘은 단실 청소나 했다. 야 정형준 제대로 안 하냐? 먼지 다 남아있네. 평소처럼 구박하고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넘기는 걸 보니 둘 사이 몇 주간의 공백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 바꿔 쓰는 거 아니라더니 서로의 기억 속에 있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달에 가고 싶다.”
얼마나 소나무인 지 이젠 이 것도 저 것도 전부 한결같아서 소름 끼칠 지경이었다. 그럼 가세요 저 멀리. 수현이 장난스럽게 창문 너머 하늘을 가리켰다. 가능했으면 진작 갔지. 그러니까, 그게 가능했으면 나도 공부 안 했지. 하나뿐인 꿈이라니 대놓고 뭐라 하지는 못하겠는데 확실한 건 저렇게 우주를 좋아하는 사람은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수현아.
“네가 그린 그림 내가 가져도 돼?”
어렸을 때 그렸다는 우주 그림. 갑작스러운 단어에 수현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 그림이 수현에게 가지는 감상은 이미 마음속 깊이 묻어둔 지 오래고, 붓을 완전히 지워버리기로 다짐한 것도 우연히 신문을 발견했던 즈음이었으니 꽤 오래전의 일이 아닌가. 진실이 제 주인을 찾은 것으로 가치를 다한 줄만 알았던 물건이 또다시 형준을 통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거 신문에 실린 게 끝이야. 너도 알잖아.
”그게 뭐 어때.“
”응?“
”네가 다시 그리면 되잖아.”
정정한다. 확실히 평소와 같지는 않았고.
”잊은 지가 언젠데.“
난 아직 안 잊었는데. 능글맞게 웃는 형준을 보며 수현이 헛웃음 쳤다. 할 말이 없게 만드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사 년 동안 수현은 형준에게 모든 고민을 다 털어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쩌다가 ’그저 그런‘ 첫인상을 가지고 있던 서로가 이제는 하나뿐인 고민 상담소가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차피 수현의 사정을 아는 것도 형준이 유일했고. 정확히 말하자면 형준에 의해 알게 된 사실이 더 많았으니.
그걸 다 알면서도 자기더러 붓을 다시 잡아달라고 말하는 형준의 속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매번 장난 삼아 정말로 자기가 우주비행사되면 그림 하나 그려달라고 하긴 했으나, 그건 말 그대로 친한 친구 사이에 흔한 농담일 뿐이었고. 무엇보다 형준은 지금 자기가 본 그 그림. 수현의 꿈의 시작이자 마지막이었던 우주. 형준과 수현 둘 모두에게 의미가 너무 커서 결국 못 버티고 산산조각 나 세상을 헤집어버린 바로 그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건 너 아니면.“
”...“
”아무도 못 그리는 그림이잖아.“
Goal-in. 수현은 여전히 어이없다는 듯 허공을 바라본다. 슬기를 비롯한 단원들이 돌아오기까지 아직 시간은 남았다. 형준도 창문 너머 허공을, 어쩌면 오래도록 꿈꾸고 있는 단 하나의 우주를 한눈에 담았다. 눈동자가 순간 반짝이는 것 같기도 했다. 갑자기? 그냥. 지금 아니면 영원히 말하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아. 묘한 기시감은 너무 이상해서 오히려 평소 같았던 탈이었음을.
수현은 내내 잠자코 있었고 형준은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분명 수현에게는 크나큰 무례이며 상처를 헤집는 일이라는 것을 다른 누구도 아닌 형준이 몰랐을 리는 없었다. 그저 실례를 무릅쓰면서까지 진심이라는 것을 수현도 알기에 쉽사리 무어라 말을 꺼낼 수 없었고. 벽에 걸린 시계는 어느덧 정각을 알렸다. 청소는 뒷전이었다.
“아직도 여기 있네?”
“이야기할 게 있어서.”
“뭔데?”
아니에요. 별 일은 아니라. 예정보다 빨리 들어온 슬기였다. 너 다음 주에 소공연 괜찮겠어? 네. 형준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둘 다 생각이 많을 땐 몸이라도 써야 적성이 풀리는 타입이었다. 간단히 인사한 후 수현이 먼저 자리를 떠나 근처 벤치에 앉았다. 흔들리는 잎사귀를 바라보다 보면 생각이 조금 정리되는 기분이었고. 그래서 고등학생 때부터 종종 가만히 나무를 올려다보기도 했다. 마침 이 것도 형준이가 알려준 거네.
다시 형준을 마주한 건 소공연 당일이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무대에 나와 연습을 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형준은 자리에 없었고. 슬기도 따로 언급이 없어 그냥 우연히 시간이 안 맞았겠거니 하고 넘겼다. 안 그래도 자리를 비운 기간이 있으니 밀린 일감들이 산더미였고. 누나 저 다시 병원 가야 할 듯. 농담하는 거보니 살 만 한가보다? 그게 아니잖아요. 아무튼 오랜만인데 또 실수하지 말고. 한 달 전만 해도 의식 불명으로 사니 마니 생사가 왔다 갔다 했던 사람을 체력 없다고 타박하는 걸 보니 슬기도 여전했다. 물론 이런 말 하면 또 뭐라 할 테니 조용히 있었다.
공연은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형준이 응원단을 권유할 당시 말버릇처럼 했던 말, 희열. 축제도 못 즐기다 보니 오랜만인 감정이 더 색다르게 다가왔다. 이제는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았다. 무대 위의 형준도 언제나처럼 해맑아 보였고. 무엇보다 눈동자에 별이 박힌 듯 반짝거렸다. 오늘은 회식이라는 슬기의 말에 우르르 몰려가 술을 부어라 마셨다. 너 회복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술 마셔도 되냐는 말은 뒤로 미뤄둔 지 오래였다. 간신히 막차 잡았고.
“수현아.”
“이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왜 안 왔어.”
무슨 일 있어요? 그렇게 평화롭게 지나가야 했을 하루였다. 아직 자정을 가리키지 않는 시계를 뒤로한 채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것이라곤 누군가의 오열 그리고 한숨. 아마 후자가 슬기의 것일 테고. 형준이 오늘을 못 넘겼어. 주소 보내둘 테니까 내일 식장으로 와. 단칼에 끊어진 탓에 남아있는 건 기계음뿐. 매정하게도 순식간에 수현의 자취방 전부를 채운다. 이게 무슨 소리야.
방해금지 모드를 풀음과 동시에 쏟아지는 수많은 문자와 부재중 전화. 모든 것이 가리키는 건 수현의 정신을 깨운다. 의심할 여지없는 현실이다. 현실은 무엇보다도 고통스럽다. 지금이라도 나가볼까 하며 몸을 일으켜봤으나 바로 그 찰나마저 벅차다. 수현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보름달은 빛을 정면으로 받아 환하고. 오늘 지나가다 들은 뉴스에서 30년 만의 슈퍼 문이라 떠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뒤늦게라도 마지막을 지킬 힘조차 남아있지 않아 수현은 그저 가만히 의자에 몸을 맡긴다. 그렇다면 사고 이후로 내가 마주했던 인영은 무엇인가. 의자 앞에는 작은 캔버스 하나가 놓여있었으며 그건 이제야 수현의 시선에 정확히 담긴다. 퇴원한 그날 나눴던 이상한 대화. 무모한 꿈이라 치부하면서도 언젠가는 기필코 우주로 발을 내뎠을 친구를 마주하기 위해 제 나름대로 준비해 온 공간. 물론 붓을 다시금 잡을 엄두가 안 나 계속 여백이 지켜왔지만. 그것은 또한 수현에게도 도전의 의미를 지녔다. 이런 시작을 원한 건 아니었는데.
마침내 수현의 손에 붓이 걸린다. 잠시 휘청대더니 이내 중심을 잡는다. 십 오 년 만의 일. 동시에 새로운 도전의 시작. 분명히 두 사람분의 것이다.
그렇게 달 한 번 밟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하다 하다 먼저 하늘로 날아가기냐. 그 너머에 내가 아직도 모르는 달이 있나. 네가 달은 유일하다며. 그래서 좋다며. 네 꿈 그거 딱 하나면서 이루지도 않고 나약하게 먼저 가긴.
너 때문에 내가 붓도 잡네.
살면서 다신 잡아볼 일 없을 줄로만 알았는데.
하여튼 날 지독하게도 잘 아는 새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