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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연이 두 달 후였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당장 예술원 입학을 위해 하루에도 몇 십번 조각칼을 들었던 그때가 전생 같았다. 사위는 조용했다. 해가 지날수록 예민해지는 공룡을 아는 기숙사 학생들이 한 층을 전부 비운 덕분이었다. 목을 벅벅 긁다가, 다리를 질질 끌면서 벽난로로 향했다.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가 어쩐지 불만스러워서 물을 끼얹었다. 치이익...소리가 난다.

 

 소리가 난다. 이번 수석도 당연히 잠뜰 선배겠지? 그럼! 회화과 교수님도 탐내셨다며! 우리 학교에서 르네상스 인이 탄생하는 걸까? 아, 잠뜰 선배는 부럽다. 앞으로의 날이 탄탄대로겠지? 달빛만이 공룡을 감싼다. 어둠과 적막 속에서 공룡이 의자 위에 쪼그려 앉았다. 다리에는 아무런 감각도 없다.

 

 조각은 돌을 이기는 재능의 증명이 아니라, 돌 앞에서 내가 얼마나 작은지를 인정하는 일이다.

  " 대리석은 없나요? "
  " 대리석이라고 하면... "
  " 혼합물이 없는 거요. “

 

 낭창한 목소리가 귀를 사로잡았다. 공룡이 아주 잘 아는 목소리였다. 석회암과 석고석 사이에서 고민하던 공룡이 바로 뒤를 돌았다. 잠뜰이 돌 입고 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쟤도 여기 왔구나. 당연하지. 경연에 참가하려면 돌을 사야 하니까. 벌써 사러 온 걸 보면 구상이 전부 끝난 걸까. 하지만 나도 떠오르는 게 하나도 없는데 마켓까지 왔으니 쟤도 그럴지도 몰라. 어쩌면 잠뜰은 구상 따위 없어도 조각품을 빚어내는 재능을 타고난 걸지도...그닥 멀지 않은 거리였기 때문에 대화는 연이어서 들렸다.

 

  " 아, 대리석은 졸업 학년들도 잘 안 써서 당장은 재고가 없어요. 학생, 당장 필요한가요? "
  " 이 주 안에 받을 수 있나요? "
  " 꼭 필요하다면 제가 삼 주 안에는 구해보겠습니다. " 
  " 그러면 좋아요. "
  " 계약은 이쪽으로 오셔서 하면 됩니다. “

 

 마켓에 딸린 안뜰 공간으로 둘이 들어갔다. 그 이후로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리석...대리석을 쓴다고? 졸업 작품도 아니고 단지 경연 뿐인데? 조각과 수석과 차석이 모두 참여한다는 소리를 듣고 모두가 출전을 포기해 버려서 참가자도 한 손이 채 안 되는 교내 경연일 뿐이었다. 한 번이라도 잠뜰을 이겨보려고 절절 매는 공룡과 다르게 잠뜰은 다른 이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 종족의 사람이었으므로 누군가를 확실히 짓밟고 싶어서 고른 것도 아닐 것이다. 그냥 그걸 하고 싶었으니까. 그랬을 거다. 그 애에게 큰 이유는 달리 없다.

 

  " 학생은 뭐 찾아요? " 
  " 아...혹시 대리석은 없나요? "
  " 응? 조각과가 무슨 과제라도 있나...꼭 필요해요? "
  " 네. "
  " 그럼 이리로 와요. 거 좋은 상단을 찾아봐야 겠네. “

  " 야, 너 구상 다했냐? “

 

기숙사 룸메이트 라더였다. 얼굴을 푹 숙이고 급식을 맛 없게 떠먹고 있던 공룡이 고개를 들었다. 의기양양한 표정이 보인다.

 

  " 아니? 너는? "
  " 나야 늘 그리던 거 할 건데. 너 생각 안 난다고 기숙사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더니 영감이 드디어 찾아오셨나 봐? "
  " 안 찾아왔어. "
  " 그럼 돌은 왜 샀어? "
  "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
  " 야, 어제 마켓에 나도 있었거든? 너 잠뜰? 걔 한테 정신 팔려서 나는 보지도 못 했냐? "
  " 아, 미안... 너는 뭐 사려고? "
  " 보라색이 다 떨어져서 새로 사려고 그랬지. 뭐, 겸사겸사 새 브랜드 붓 쇼핑 좀 하고."
  " 너는 그 칙칙한 보라 좀 그림에 그만 써라. "
  " 보라를 쓰지 못 한다면 난 그림을 그리는 의미가 없어. “

 

 초코 머핀을 라더가 입에 구겨 넣었다. 이 자식은 풍경화만 그리는 놈이 도대체 보라를 왜 그림에 넣는 거야? 제 눈에는 이 세상이 보랏빛으로 보이나 보지? 그보다 말이야, 라더가 목소리를 낮추며 소곤거리는 바람에 공룡이 덩달아 몸을 앞으로 당겨 귀를 대었다.

 

  " 너희 조각과 수석 말야. 설마 이번 경연 회화 분야도 참가하냐? "
  " 뭐? 그게 무슨 소리야? "
  " 아니, 학생회 애들 말로는 두 분야 이상에 출전하는 게 규정에 어긋나는 건 아니라고 하더라고? 요즘 우리 전공 수업에 자꾸 들어오길래 혹시나 해서. "
  " 너희 교수가 걔 편애한다며. "
  " 그래! 아오, 내가 그거 때문에 속 터져서 죽겠어. 이러다가 견습 궁정 화가 자리 걔한테 주는 거 아니야? 그럼 나 뭐 먹고 살지? "
  " 너는 걔 아니더라도 궁정 화가 못 해. "
  " 뭐? 왜? "
  " 해에 보라색 쓰는 미친놈을 왜 폐하가 들이겠냐. 정신 차려라. "
  " 야! 벌써 다 먹었냐? "
  " 체 할 것 같아서 못 먹겠다. "
  " 저게 별일이네. 알았어. “ 

 

 곧 있으면 종이 친다. 그다음은 전공 수업이었으나, 요 며칠 공룡은 전공을 빠졌다. 수업은 언제나 중간 수준들을 위해 준비되어서 그로서는 별로 배울 것이 없었다. 형태감을 배우는 건 일찍이 아버지와 함께 뗀 그였다. 게다가 한창 수준과 동 떨어지는 실력을 갖췄으면서 가장 앞자리에서 가장 수업을열의 있게 듣는 잠뜰을 보고 싶지 않았다. 공룡은 도서관으로 향했다.

언젠가부터는 평소처럼 영감이 찾아오지 않았다. 글자보다 조각하는 법을 먼저 배운 공룡이었다. 형태가 없는 무형의 것부터 유명 조각가의 모방품, 자신만의 것을 모두 거쳐왔었다. 단 한 번도 최고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신화를 듣든 연극을 보든 소설을 읽는 모든 신경이 조각으로 귀결되는 시절이 있었다.

 

 [4대 문명 형성의 이해] [정치학 입문] [쉬운 가드닝] [그림자 조형법] [일반 물리학 2]

 

 반납 도서 칸에 일관성이 없는 책이 쌓여있었다. 그 중 딱히 끌리는 것은 없었다. 공룡은 서가를 계속 빙빙 돌다가, 제목이 도발적인 책 하나를 끌어냈다. 도서관에는 푹신한 가죽 의자가 있다. 그곳에 앉으면 따스한 햇살을 받을 수 있어 공룡이 좋아하는 자리였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비슷한지 그 곳은 언제나 인기가 많아 사람이 없는 날이 없었는데, 모든 학과가 전공 시간인 지금도 그랬다. 그곳에는 잠뜰이 있었다.

 

 [세계사와 독약]

 도서관에는 둘 밖에 없었다. 얼굴을 인식한 순간 공룡이 그 자리에서 굳었다. 인기척을 눈치챈 잠뜰이 잠깐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련의 행동에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공룡은 책을 대출해서 기숙사로 돌아왔다. 황급히.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도.

 

 [고대 신화 속 주술 입문]

 

 제 침대에 올라와서야 공룡은 자신의 책 선정을 후회했다. 책을 펼쳐보았더니 안은 고대 신화 속 주술 입문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을 선정한 것이 치기가 아닌 순수한 학문적 흥미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고대어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고대어 수업은 희망 수강자 수가 너무 적어서 폐강되었다. 애초에 왜 예술원에 고대어 수업을 개설하려고 했던 건지 이해도 안 가고.

 

  " 뭐 건질 거 없나.“

 

 삽화라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도서관을 다시 가면 영락없이 잠뜰을 다시 마주칠 것이다. 물론 걔는 아무런 신경도 안 쓰겠지. 수석 차석 한데 묶어 열린 행사가 몇 갠데 거기서 단 한 번도, 대화는 커녕 눈길도 주지 않았던 잠뜰이었다. 언제나 제 이름 밑에 있는 공룡이라는 글자가 궁금할 법도 한데 단 한 번도. 그 애는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친구가 없는 것도 그네들은 저 마다 망상을 부풀려서 칭송하기 바빴다. 잠뜰은 그런 애가 아니야. 너희 생각만큼 그렇게 대단하고 고결한 애가 아니라고. 너희는 걔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렇다면 공룡은 더다.

 

 책의 페이지를 막 넘기는데, 낡은 종이가 한 장 떨어졌다.

  [{■■ 소환법}

 

 시전자의 피 한 방울, 시전자의 엄지손톱, 시전자의 머리카락 한 움큼, 소금 20g, 달빛 먹은 이슬 한 숟가락, 꿀 두 숟가락]

금방이라도 이단 심판관에 잡혀갈 만한 내용들로만 빼곡하게 적힌 낡은 종이였다. 공룡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라는 것을 떠올리며 주문을 외운다.]

 

  " 너는 내가 바라는 게 뭐라고 생각하냐? "
  " 조각과 수석과 아버지의 인정. "
  " 음. "
  " 잠뜰 끌어내리기? “

공룡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라더를 바라봤다.

 

  " 왜? "
  " 걔 아직도 너네 전공 들어가? "
  " 요 며칠은 안 들어오던데? 뭐, 걔 아니더라도 요즘은 다들 경연 준비하느라 수업 안 들어오지. 뭐, 너희 과는 다르겠지만. "
  " 우리가 뭐? "
  " 상품도 딱히 없는 경연에 수석이랑 차석이 둘 다 한다니까 다들 포기했잖아. 너는 참여만 해도 입상 아니야? "
  " 그건 모르는 거지. "
  " 하! 입학식을 기억하는데. 내가 왜 차석이냐고 얼굴이 새빨개져가지고 단상에서 잠뜰만 노려보고... "
  " 조용히 해! "
  " 그래, 도련님이 얼마나 힘들었겠냐. 자존심 많이 짓밟혔겠지. "


 무어라 반박하기 위해 입을 움찔거리던 공룡의 어깨에 라더가 손을 얹었다.
 

" 녀석, 힘내. 원래 승부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는 거야. "
  " 야, 말이 무슨... "
  " 지금을 잘 노려. "
  " 뭔 소리야? “

 

 영문도 모르겠는 소리를 남기고 라더가 떠났다.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공룡이 뒷머리를 벅벅 긁고 있는데, 얼굴만 아는 여자애 여럿이 공룡 앞에 섰다. 그러니까, 잠뜰의 팬클럽이었다.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시험이 끝나면 학관 벽 바깥에 붙는 순위를 제일 먼저 확인하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잠뜰을 칭송하는 무리 말이다. 공룡은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잠뜰은 공룡은 물론이고 팬클럽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돌려주지 않는 상대에게 호의를 주는 것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돌려주지 않는 상대에게 감정을 주는 것이...

 

  " 선배, 그 소문 들으셨죠? "
  " 무슨 소문? "
  " 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
  " 대뜸 와서 선배를 겁박하는 게 너희 기숙사 풍조야? "
  " 잠뜰 선배가 조각과 교수님들한테 개인 과외 받는다는 소문이요. "
  " 뭐? "
  " 당연히 헛소문이겠지만... “

 저들끼리 속삭거렸다. 아니야? 모르는 얼굴인데? 아씨, 그럼 누구야? 분명 잠뜰 선배를 질투해서 그런 헛소문을 퍼뜨린 걸 거야.

 

  " 모르시면 됐어요. "
  " 야, 너희 어이없다. 너희 기숙사 반장 누구야? "
  " 선배 전적 있잖아요! "
  " 무슨 전적? "
  " 2년 전에 잠뜰 선배 칼 다 훔쳐 간 적 있으시잖아요! "
  " ...그건! "
  " 아니면 됐어요. “

 잠뜰이 조각과 교수들에게 개인 과외를 받는다는 소문이라니. 터무니 없었다. 그야, 개인 과외를 받는 사람은 잠뜰이 아니라 공룡이었기 때문에. 1학년 때부터 그랬다. 아버지가 예술원 입학 전부터 아들을 잘 봐달랍시고 온갖 것을 다 해다 바쳤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잠뜰이 실제로 개인 과외를 받을 확률은 낮았다. 왜냐하면, 잠뜰은 그런 애였으니까.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도 모셔 온 교수진도 그 애를 가르치기에 부족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소문이 잘못 난 것이다. 잠뜰이 아니라 공룡인데. 헛소문의 발원지를 찾던 잠뜰이 공룡의 개인 과외를 떠벌린다면? 쫓겨날 것이다. 명백한 비리이므로 모두가 줄줄이 재판에 회부될 수도 있었다. 공룡은 손톱을 깨물었다. 엄지손톱이 깨졌다.

 

 [{■■ 소환법}

시전자의 피 한 방울, 시전자의 엄지손톱, 시전자의 머리카락 한 움큼, 소금 20g, 달빛 먹은 이슬 한 숟가락, 꿀 두 숟가락

바라는 것을 떠올리며 주문을 외운다.]

 

 공룡은 주문을 외웠다. 고대어는 아주 어렸을 적 배워서 자신이 없었다. 피 먹은 소금이 괴악하게 느껴졌다. 덩어리 진 형체가 바라볼수록 구역질이 났다. 고통스러워. 이런 짓이라도 해야 마음이 진정될 것 같다는 게. 너, 여기까지 추락했구나. 참 우스워. 두 달. 아니, 이제는 한 달 하고 조금이다.이번에도 이기지 못한다면 졸업까지는 구태여 힘을 보태지 않아도 쉽게 상상되었다. 한 번이 간절한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힘 쓰지 않는 경연. 단순한 교내 경연. 그때였다, 달빛을 받은 형체가 부글부글 끓었다. 금세 침대 헤드까지 등을 붙인 공룡 위로 그림자가 지더니, 또래처럼 보이는 남자아이가 하나 떨어졌다. 갑자기 느껴지는 무게에 공룡이 소리를 내질렀다.

 

 ■■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유령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유령은 그림자가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명명된 사실이 아니라 전해 들은 말이라 사실과 다를지도 모르지만. 공룡은 그것의 이름을 수현이라 지었다. 아주 예전에, 신화에서 본 어리석은 남자 이름이 수현이었다. 자신이 만든 조각에 심취해서 신을 모독하는 중죄를 지은 남자 말이다. 수현은 오로지 공룡의 눈에만 보였다. 발소리 없이 걸을 수 있고, 형태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가 하면, 때때로 공룡의 마음을 읽었다. 그러나 수현이 입을 열어서 자신의 저의를 공룡에게 전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한 방향만의 소통인 것이었다. 공룡은 절대로 수현을 알지 못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무언가를 자세히 안다고 해서 탐구의 결론이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수현은 언제나 따라붙었다. 그런가 하면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사라졌다. 드디어 사라졌나 안심하고 있노라면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모든 신경이 그로 집중되었다. 무언가가 갈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피가 사아아아아, 식혀진다. 보라색 눈이 날 따라와. 그게 날 바라봐. 너머의 어떤 것을 응시해...

  " 무슨 일 있어? "
  " 없어. "
  " 잠 못 잔 눈인데. 어제저녁에는 어딜 다녀온 거야? "
  " 알 거 없어. "
  " 와, 매정하긴. “

 혀를 쯧쯧 차던 라더가 계단을 올라갔다. 회화과 쪽이었으니 경연 준비를 하러 가는 게 틀림없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그렇지. 준비를 해야 한다. 공룡은 모든 신경을 잠뜰에게, 그리고 수현에게 뺏겼다. 아직 무엇을 빚을지 조차 결정하지 못했다. 1등은 고사하고 완성이라도 해야 해. 아니, 무슨 소리야? 당연히 1등을 해야지. 단 한 번이라도 걔를 이기지 못한다면 나는...

 

 나는 뭐지?

 그때, 줄곧 옆에 있던 수현이 웃었다. 간단한 표정 변화 정도야 있었지만 입에 담은 웃음을 내뱉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공룡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고개를 돌려 수현을 바라봤다.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진다.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연습실로 내려갔는데, 잠긴 문을 억지로 열려다가 철제 자물쇠에 손을 다치고 말았다. 심한 부상은 아니었으나, 당분간 조각칼을 만지지 못할 것은 자연했다. 얻은 것은 있었다. 긁히며 피가 몇 방울 흘러내리자마자 수현이 빠른 속도로 눈을 깜빡거리더니 공룡을 바라보았다. 원하는 것이 있는 눈치였다. 공룡은 당연히 허락하지 않았으나 수현이 더 빨랐다. 두 손으로 피나는 오른손을 잡아 쥐더니, 중얼거리며 무어라 주문을 외웠다. 피는 전부 사라졌다. 흔적도 없었다. 고통만이 이것이 착각이 아님을 증명했다.

문이 열렸다. 어설프지 않게 걸려있던 자물쇠는 원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말았다. 어이가 없어진 공룡이 열린 문 안과 수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 네가 바라던 거, 아냐? “

 

 공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의자에 앉았다. 달빛이 창문 사이로 겨우 흘러 들어왔다. 수현이 웃은 듯도 했다. 웃었나? 아니, 비웃었나? 감정을 내비쳤나? 나를 바라봤나?

 

 바라던 거?

 

 편지가 왔다. 경연이든 뭐든, 시상은 예술원에 크게 기여한 사람들이 했다. 그러니까, 아버지 말이다. 해마다 가문 재산을 무수히 쏟아 넣는. 너는 앞으로 네 형을 도와서 우리 가문의 번영을 이끌어야 하니까. 아버지가 다리를 다쳐 이번에는 참석하지 못한다는 편지였다. 공룡은 어제 코피를 흘렸다. 언젠가부터 연례행사마냥 찾아오는 것이...손수건을 가득 적신다. 집에서 보내주는 손수건은 불편할 정도로 부드럽다.

 

 바라는 것이란 무엇일까? 어째서 공룡도 정의하지 못하는 것을 수현은 아는 걸까. 어쩌면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단순한 피 이외에 이후의 공룡의 삶 혹은 영혼을 요구한다든지...

 

 그리고 어쩌면, 몇 번만 수고한다면 그에게 1등을 안겨주지는 않으려나...그것은 아주 오랫동안 공룡이 바라던 것이었다. 잠뜰을 이겨 먹는 것 말이다.

 

  " 어때? “

 라더가 경연에 낼 본인의 그림을 보여줬다. 눈 감고 보더라도 그의 스타일이 확연히 드러나 있는 그림이었다. 풍경화인데, 귀족들이 대다수인 예술원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익숙할 만한 정원화인데, 구조가 불만스럽다. 공룡은 그의 집요하고 근질거리는 성격이 그림에서 나타난다고 본다. 불안한 구조와 억지로 뒤집어놓은 물리법칙은 제 존재감은 마음껏 발산하다가 보라색에서 완전히 턴을 빼앗긴다. 하지만 뭐, 엉터리스럽지는 않고. 정제된 공간에서 단정한 붓터치로 폭력을 목도하고 싶은 사람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지. 변태들 말이야.

 

  " 버릇은 개도 못 준다더니. "
  " 칭찬 감사드립니다. "
  " 왜 하필 보라색이야? “

 라더가 콧잔등을 쓱, 훑었다. 미처 닦지 못한 물감 잔량이 코에 묻었다. 적포도주의 색이다. 지난 방학에, 학교로 돌아오기 전 마지막 만찬 때 아버지가 쥐여준 잔이 생각난다. 공룡은 반도 비우지 못했다. 쓰지는 않았지만, 무척이나 썼다. 입안이 타들어 간다. 성과를 내야지? 네. 한 마디 하지 못한 입이 쓰다. 비틀어지는 기분이다.

 

  " 너는 모르겠지만, 이 세상의 대부분의 것들은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아. 네가 잠뜰을 볼 때마다 눈이 호승심으로 불타오르는 것도 이유가 있지는 않잖아? "
  " 있는데? "
  " 뭔데? "
  "..."
  " 대답 못하네. “

 

 라더가 그림을 옮겨놨다. 마무리 작업은 물감이 굳은 후에 하려는 요량이었다. 아, 이제 놀아야지. 백개먼하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거렸어. 같이 할래? 아, 너 아직 구상도 안 했다고 했나? 조각은 영 성가셔. 성가시지 않아. 회화과로 이참에 전향할래? 헛소리하지 마.

 

 사실 만들고 싶은 조각은 생각에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 실체로 구현해 낼 것인지가 문제였다. 생각은 언제나 바깥으로 내뱉을 때 문제를 일으킨다. 가지고만 있으면 아무 일도 없다. 아무도 없는 연습실에서 공룡이 돌을 우두커니 바라봤다. 상태가 좋았다. 정말로. 이렇게 좋은 돌은 처음 봤다. 손을 대기만 해도 원하는 대로 깎여나갈 줄 것만 같았다. 물론,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수현이 공룡을 내려다본다. 아니, 내려다보나? 공룡을 보는 게 맞나? 돌을 보고 있나? 시선이 가는 것이 맞는가? 눈에는 무언가가 맺히는가? 그에게도 각막과 유리체 내지는 수정체가 존재하는가? 인간인가? 인간과 같은 구조를 지니는가? 그러하며는 인간인가?

 

 수현이 웃는다. 웃었다. 인간이 아니라면 뭐니?

 

 공룡은 세밀한 작업을 하지 못한다. 어느 순간부터 조각칼만 들면 손이 떨렸다. 가벼운 모델로 바꾸어도 그랬다. 관절에 좋다는 약과 능통하다는 의사를 찾아봤는데 별로 쓸모가 없었다. 정교하지만 못 할 뿐이지 조각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일상생활에도. 그것보다는 불량품인 양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더 쓰렸다. 손에서 피가 났다. 검지 손톱 근처를 칼에다 스쳤다. 황급히 돌을 바라봤다. 다행히, 물들지 않았다. 여전히 순백이었다. 손을 쥐고 물러선다. 옆에 있던, 언제나 옆을 지키던 인영으로 몸을 돌린다. 수현이 웃는다. 기다린다. 여전히 웃다, 농도가 옅어지다가. 왜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아? 수현이 입을 연다. 그게, 네가 진짜로 바라는 거야?

 

 무슨 소리야?

 

 예술원 내 전시실은 내일부터 잠시 문을 닫는다. 안의 공간을 정비하고 새로운 작품들을 들일 공간을 만든다. 사람이 많았다. 평소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녀석들이 제한을 두니 그제야 달려와 그것들을 탐닉한다. 공룡은 의식적으로 조각과의 공간을 지나쳤다. 목소리는 귀에 꽂힌다. 듣고 싶지 않더라도. 역시 잠뜰 선배는. 천재일까? 재능인가. 근데 그 소문 진짜야? 그걸 믿어? 그런 천재가 설령 과외를 받더라도 어때? 그게 조각의 미래에 더 도움 되는 일일걸. 다음 작품도 기대된다... 그 옆에는 공룡이 있다. 교수들이다. 공룡 군의 작품도. 총명하지. 어렸을 때부터 관망했었는데. 집안이. 모티브를 많이 주지요. 저는 특히 공룡 군의 연작을 참 좋아하는데요...

 

 목소리들이 걷힌다. 잠뜰이다. 회화과의 공간 앞에 서 있다. 그림은,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다. 3등. 미려한 화면 구성이야 말할 만 하지만 나머지는 그닥이다. 잠뜰은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있나? 그것을 보고 있는 건가? 어째서? 공룡은 저도 모르게 옆으로 다가가 섰다. 시선을 따라가고 싶었다. 고대 신화다. 7장 2절. 천사가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 너, 이번에 뭐 만들 거야? “

 

입이 먼저였다. 그것을 책망하기도 전에 잠뜰이 느릿하게 대답한다.

  " 꼭 말해야 해? “

 

맑은 눈으로 공룡을 바라봤다.

 

  " 그건 아니지만. "
  " 그래. “

 

 맑은 눈. 그렇다면 공룡의 눈은 어땠을까? 구태여 거울을 바라볼 필요도 없었다. 얘는 나한테 아주 조금의 경쟁의식도 가지고 있지 않구나. 이 감정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구나. 명치께가 아파온다. 공룡은 발을 돌려 기숙사로 돌아왔다. 내 눈이 어땠지?

 

  " 표면을 조금 거칠게 가는 게 낫지 않을까? "
  " 예? "
  " 구조는 다 좋은데, 모티브가 어리석은 조각가 잖나. 신의 진노를 상징하는 우화니 바닥면으로부터 올라오는 곳을 갈아서. 이해하지? "
  " 예. 이해했습니다. "
  " 이번 초청 심사 위원이 재질을 중요시여겨.“

 교수가 피곤한 듯이 손을 저었다. 공룡이 허리를 숙이고 방에서 나왔다. 거칠게 갈고 싶지 않았다. 안온한 매질이 우화의 이질감을 장식하는 거다. 교수는 비율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내 작품이 괜찮았다는 뜻일까? 공룡이 고뇌했다. 물렁해보이는 감각을 살리고 싶었다. 중간중간 돌이 부서질 위험을 감수하고도. 공룡이 사포를 들었다. 멈칫했다가, 조언을 되새겼다. 손톱이 갈린다. 각도를 조정하면 금세라도 피가 머금어질 것 같다. 얼굴을 떠올린다. 불편한 미소. 수현에게 그것을, 나를 바치면 이 모든 게 해결 되는가? 손은 내내 하얬다. 불순물은 없었다.

 

  " 야, 너 이번 거 잘 깎았더라. "
  " 그래. "
  "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 되었네. "
  " 싸우자는 거야? "
  " 아니. “

 라더가 실실거렸다. 회화과 참가 인원 7명 중 4명의 모티브가 겹쳤다. 아주 낮은 확률이었다. 라더는 원래도 수상 성적이 좋으니 운이 좋다면 1등을 거머쥘 수 있을 것이다.

 

  " 야, 근데. 저건 네가 아니지 않냐? “

 

 공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 네가 하단부 재질 신경 쓴 거 처음 보는데.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알 것 같네. “

 

 라더가 킥킥 웃으며 심사 위원 단상을 꾹 쳐다봤다. 공룡은 대답하지 않았다.

 

 전시실 한 가운데에 놓인 것은 단연 잠뜰의 조각이었다.

 

 크게 보아 조각은 사람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지만, 완전한 인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그러나 비례는 정확했다. 어깨의 너비와 골반의 각, 무게가 실리는 발의 방향까지 계산된 균형이었다. 그럼에도 첫인상은 안정이 아니라 멈춤이었다. 막 한 걸음을 내딛으려다, 그 직전에 시간이 고정된 듯한 자세였다. 누군가가 잡아 끌었을까? 그렇다면 이유는 무엇인가? 표면은 대리석 특유의 광택을 의도적으로 억제한 상태였다. 연마는 충분했으나, 거울처럼 빛을 반사하지는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면 미세한 결이 손끝에 걸릴 정도로만 남겨져 있었다. 지나치게 매끈하지 않은 그 질감이, 형상이 가진 긴장을 오히려 오래 붙잡아 두었다. 빛은 표면 위에서 미끄러지지 않고, 천천히 머물다 흩어진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얼굴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얼굴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눈과 코, 입이 있어야 할 자리는 암시만 남긴 채 비어 있었다. 그러나 결핍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비워진 면이 주변의 모든 시선을 받아내는 중심처럼 기능하고 있었다. 관객은 저마다 다른 표정을 그 자리에 겹쳐 보게 될 수밖에 없었다. 조각은 무엇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 서사도, 상징도, 모티브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대신 형태 자체가 질문이 되었다. 이 인물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멈추는 법을 배운 것인가. 완성 중인 것인가, 이미 끝난 것인가. 끝나지 않았다. 잠뜰의 조각은. 공룡은 그것을 잘 안다. 발밑은 거칠게 남겨져 있었다. 조각칼이 멈춘 지점이 명확했다. 일부러 마무리하지 않은 흔적이었다. 위로 갈수록 정제되고, 아래로 갈수록 원석에 가까워지는 구조는 위계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방식이었다.

 

 이 조각은 솜씨를 증명하지 않았다. 대리석을 지배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대리석이 스스로 어떤 형태를 허락했는지를 기록한 결과물에 가까웠다. 조각가의 의지는 분명했지만, 그 의지가 재료 위에 폭력적으로 남아 있지는 않았다.

 

 라더가 줄곧 실실거렸다. 공룡은 이것이 비난이나 조롱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제각기 소란했던 장내가 사뭇 잦아들고, 예술원장이 앞으로 나온다. 이윽고 결과를 발표한다. 아버지는 없다.

 

  " 조각과. 1등 잠뜰. “

 

 예상한 결과다. 박수가 장내를 잔뜩 메운다. 공룡은 박수를 치지 않는다. 아니, 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각 부문은 총 3명이 참여했다. 공룡의 등수는 3등이었다. 교수들이 공룡의 안색을 살폈다. 모두 아버지의 후원을 받는 자들이었다. 안색을 살피려고 한다. 눈앞이 흐리다. 보이지 않는다. 명확히 보이는 것은 수현 뿐이다. 무언가가 종결된다. 공룡은 제 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는 뜨거운 혈액을 느낀다. 내가 바란 게 이건가? 완전한 패배?

 

 잠뜰은 한동안 말없이 그 조각 앞에 서 있었다.

 

 미학적으로 흠잡을 곳은 없었다. 비례는 고전적이었고, 표면의 리듬은 의도적으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조각을 아는 사람의 손길, 무엇을 덜어내야 하고 무엇을 숨겨야 하는지 정확히 아는 판단. 그래서 잠뜰은 이 작품이 더 낯설었다. 분명 누군가를 떠올리며 만든 조각이었을 것이다. 그 사실만은 이상하리만치 또렷했다. 하지만 잠뜰은 그 누군가를 알지 못했고, 결국 머릿속에는 오래된 신화 하나가 떠올랐다. 신의 은총을 받아 위대한 작품을 남겼으나, 끝내 인간의 언어를 잃어버린 장인의 이야기. 우화 속 조각가는 천사의 도움으로 명성에 올랐다. 세상은 그의 작품을 찬미했고, 그는 더는 실패하지 않았다. 대신, 가장 중요한 것은 조용히 사라졌다.

 

 잠뜰의 시선은 다시 조각으로 돌아왔다. 얼굴을 살핀다. 조각의 얼굴이다. 온화한 미소, 모든 것을 받아들인 듯한 평정.

 

 그 미소가 이상했다. 무언가를 잃은 사람의 얼굴치고는, 지나치게 부드러웠다. 돌눈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잠뜰은 알 수 있었다. 이 조각은 완성되었고, 동시에 끝나버린 작품이라는 것을.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전시장은 조용히 식어갔다. 끝나버렸네. 하지만 뭐가? 무언가를 떠올리려다가 그만뒀다. 뻐근한 손 관절이 비누라도 좋으니 무언가를 만지며 갉아보라며 아우성을 치고 있다. 조금 있으면 언제나처럼 사람들이 달려와 붙을 거다. 더 볼 것은 없었다. 잠뜰이 미련 없이 회장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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