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현실에 존재하는 종교와 관련이 없습니다. 작가는 무교이며 특정 종교를 전파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전혀 없음을 알립니다.
99/12/28 10:00
누나가 실종된 지 1년이 지났다. 내 생이 멈춘 지 1년 되었다.
1년간 밖에 나가지 않았다. 3평짜리 암흑에서 최소한의 연명 활동만 이어갔다. 그조차 포기하고 싶은 날이 많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누나가 돌아올 거라는 희망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내게 고통만 주었다. 도움도 되지 않는, 비현실적이고 낙관적인 감정 따위. 그보다는 막연한 의무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혹여나 누나가 돌아왔을 때 누나에게 인사를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이 말인즉 나에게 연락할 사람 또한 없다는 뜻이다. 애초에 그리 친밀하지도 않았지만, 그나마 오던 연락도 전부 차단한 지 오래였고. 그러니까,
분명
누나 외에는
아무도 없을 텐데.
나는 누나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 온 걸까, 이 편지는.
발신인 정보도 없이 메시지만 덩그러니 적혀있는 이 문장은.
라더에게. 날 만나러 와, Venezia.
누구를 만날 수 있단 걸까.
──를 만날 수 있다기엔 너무나 실재적이고
누나를 만날 수 있다기엔 너무나 늦어버렸다.
추락하는 천사들의 도시
99/12/28 15:20
여전히 겨울이었다. 버스 안, 서리 낀 차창 너머로 줄지어 선 사람들의 행렬이 보였다. 시위라도 하는 걸까. 그들은 하나같이 팻말을 들고 거리를 장악해 갔다.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웅웅거리며 차창이 울렸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창문을 여니 곧바로 날카로운 소리가 버스 안으로 파고들었다. 꽹과리 소리 같았다. 귀가 아렸다. 성난 소음이 그치자 한 남자가 확성기를 들고 말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 종말이 도래했습니다. 모두 회개하십시오! 12월 31일이 바로 종말의 날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행렬의 정체는 종말을 주장하는 단체였다. 그들은 2000년이 오는 순간 세상이 멸망한다며 회개와 구원을 외쳤다. 줄을 따르는 행렬이 길었다. 사람들 사이에선 나름 신빙성 있는 주장인 듯 했다.
하지만 정말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나는 이미 죽었다. 누나가 사라진 1년 전, 그리고 언젠지 모르는, 누나가 죽었다는 생각이 처음 스친 그 순간 그 자리에 스스로를 묻어버렸다. 누나가 죽었을 거라고 처음 의심이 든 순간, 내 안의 작은 악마를 마주하던 그 순간. 수억 분의 일 초 동안 나는 수백 번 죽고 또 죽었다, 해가 뜨고 달이 지는 억겁과도 같은 찰나의 세월 속에서 나는 홀로 그 순간 속에 갇혀 누나를 보내버린 나를 죽이고 또 죽였다.
그러니 진실로 누나가 살아서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 이상,
나는 세계가 멸망하는 것 따위 상관없었다.
99/12/28 19:30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인천공항은 여전히 밝았다. 주광색이 스며든 활주로와 터키 블루로 빛나는 여객터미널이 시선을 붙잡았다. 건물과의 대비 때문인지 그날의 밤하늘은 집에서 보던 풍경보다 더 검었다. 온통 인간의 것들로 가득 찬 풍경. 하늘에는 달조차 사라져 있었다. 별 하나 없이 인공위성만 반짝이는 밤하늘이 오늘따라 초라해 보였다. 저 멀리서 지게차가 지나갔다. 탑승한 비행기 주위로 항공사 직원들이 오갔다. 최종 점검을 마친 모양이었다.
그때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안전벨트를 하고 떠날 준비를 하라는 상투적인 내용. 이로써 두 번째 듣는 안내 멘트였다. 처음은 누나와 같이 들었고.
3년 전이었다. 누나는 친구들과 떠나는 수학여행 대신 나와의 여행을 골랐다. 수학여행보다 둘이 다니는 게 더 싸다며 웃었지만, 비행기만큼은 타고 싶었는지 목적지는 제주도였다.
손님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이제 이륙하겠습니다. 좌석 벨트를 매셨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누나는 고작 17살이었다. 17살의 누나는 보호자 하나 없이 3만 피트 상공을 가로질렀다. 옆자리에 어린 나를 두고서 고등학생이었던 누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난생처음 보는 풍경에 감탄했을까, 아니면 처음 하는 비행에 두려움을 느꼈을까. 누나가 없는 18살의 나는 알지 못한다. 옆자리에는 낯선 어른이 앉아 있고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빛 하나 없이 까마득하다.
한국의 불빛이 멀어진다. 나는 고향의 여명에 구태여 초점을 잡지 않은 채 생각한다.
잠뜰을.
99/12/29 00:00
저녁에 이륙하여 약 12시간을 비행했지만 여전히 밤이었다. 낮에 도착해 천천히 숙소를 알아보려던 계획이 틀어졌다. 어둑한 도시의 야경을 가르며 급하게 숙소를 찾아 뛰었다.
운이 좋았다. 평점은 낮지만 늦은 시간에도 사람을 받아주는 숙소를 찾았다. 숙박료 역시 저렴했기에 이곳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숙소에 도착해 보니 평점을 배신하지 않는 감상을 마주했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벽 옆에는 낡은 침대와 협탁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모든 가구가 부서지기 직전이었다. 저렴한 이유가 있었다. 그래도 물 나오고 누울 자리 있는 게 어디인지. 애써 스스로를 위안했다.
장시간의 비행으로 몸이 찌뿌둥했다. 기내에서 버틴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 육체는 기꺼이 잠에 빠져 들었다.
99/12/29 ¿¿:¿¿
라더야.
열린 문틈 사이로 희미한 빛이 방 안을 파고들었다. 순백의 부연 새벽빛 사이로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친숙한 몸짓. 주저 없는 부름. 잊을 수 없는… 목소리.
낮 12시에 산 마르코 광장으로 와.
이윽고 실루엣은 문으로 향했다. 말은 단호한 반면 시선은 여전히 나에게 가닿았다. 그게 나에게는 꼭 머뭇거림처럼 보였다. 가지 마. 이 말을 실제로 입 밖으로 내뱉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것은 내 말에 신호를 받은 듯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안돼. 붙잡으려 했지만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손발이 납으로 굳은 듯 한 치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애쓸수록 실루엣은 멀어지고 빛은 강해졌다.
실루엣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는 빛이 공간을 장악한 이후였다. 눈부신, 빛, 고결한, 광채, 커튼을 걷으면 어둠에 적응된 눈을 내리부수는, 절대적인 힘.
결국 나는 방을 가득 메운 찬란 속에 침몰했다.
아, 토할 것 같아.
99/12/29 12:00
연말의 베네치아는 한가했다. 한겨울에 베네치아를 찾는 관광객은 거의 없었다. 몇십 분째 광장에 서 있어도 시야에는 온통 현지인들만 가득할 뿐, 나와 같은 나라에서 온 사람은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미처 잠그지 못한 패딩 사이로 들어왔다. 외로웠다. 먼지 쌓인 밤낮을 홀로 견뎌야 했던 1년보다도 지금이 더 그러했다. 타지의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이방인이었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데다 겉모습도 습관도 모두 다른 이상한 개체. 이곳에서 내가 알았던 세상의 흔적은 오로지 나 자신 뿐이었다.
이곳에 정말 누나가 있을까? 분명 새벽의 실루엣은 누나일 것이라 자신 있게 판단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믿음이 흐려져 갔다. 지금은 정말 그런 내용의 꿈을 꾸었는지도 단언할 수 없었다. 내가 착각한 건 아닐까? 누나를 너무 그리워해서 내 무의식이 환상을 만들어낸 건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지금 이 순간조차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라더야!”
그때, 들리는─
“왔구나.”
동그란 눈매에 갈색 눈동자. 조금은 허스키하면서 짓궃은 목소리. 기억에서 흐려지지도 않은 포근한 비누 냄새. 교실에서도, 꿈에서도, 하다못해 낯선 이들이 가득한 이방의 땅에서도 또렷한. 암흑 속에서 수백 번을 그려본. 당신, 그러니까 누나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누나…”
“자, 가자!”
눈물이 날 틈도 없이,
“어?”
누나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고는 냅다 달렸다. 누나나여기길모르는데?!
99/12/29 13:00
“누나, 아니, 이게 뭐야?”
“스파게티. 몰라?”
“지금 내가 그걸 몰라서….”
그럼 뭐? 누나는 쟤가 왜 저러냐, 라는 듯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연기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러면 내가 이상한 사람 같잖아. 진짜 몰라서 저러나?
“누나 혹시, 머리 다쳤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온갖 가설들이 머리를 스쳤다. 대개는 좋지 않은 내용이었다. 구체화할 엄두도 나지 않는 끔찍한 것들. 그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베네치아에는 왜 온 건지. 나한테는 왜… 언질조차 없었는지.
“뭐래? 야,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누나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아야!”
아프잖아!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흘기려다 누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한 채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음음. 역시 내가 잘못한 거겠지.
“밥이나 먹어. 오늘 할 거 많아.”
근데 그 정도는 물어봐도 되는 거 아닌가? 물으려다 다시 고개를 내렸다. 누나가 참 열정적으로 스파게티를 썰고 있더라고. 근데 스파게티는 썰면 안 되지 않나? 아니다. 내가 잘못 알고 있던 거겠지. 음음. 나는 다시 스파게티 먹방에 집중했다. 맛있네.
99/12/29 16:00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도중에 몇 번이고 도망가고 싶던 걸 간신히 참았다. 여기 갔다 저기 갔다, 먹고 싶은 건 왜 이리 많은지. 평소에 외출도 잘 안 하던 인간이 왜 저래? 저질 체력이라 타박하는 데 누나 때문이라고 반론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그 얘기를 하기에는 누나가 너무 신나 보여서. 뭐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면 되니까….
“라더야, 너 초코 젤라또 먹어봤어? 여기가 제일 맛있어. 유명 브랜드래.”
딴생각 도중 누나가 건네는 아이스크림을 손에 쥐었다. 이름이 벤키? 그랬던 거 같은데. 한 입 베어먹으니 부드럽고 쫀득한 식감이 굴러왔다. 다시 한번 크게 머금으니 달큰한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맛있네?”
“그치? 그니까 좀만 더 버텨봐.”
…맛있다고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걷다 보니 건너편 건축물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몇 개가 담 안에 모여있었는데, 백색 둥근 지붕 몇 개와 주황색 경사 지붕이 조화로웠다. 왜인지 모르게 자꾸만 시선이 갔다.
“누나, 저건 뭐야?”
누나는 흘끗 보더니 바로 답했다.
“저거? 살루테 성당. 왜, 가볼래? 배 타야하긴 해.”
“음, 어. 왠지 가보고 싶네.”
가까이서 본 성당은 멀리서 볼 때와 비교도 안 되게 웅장했다.수직으로 뻗은 기둥들 위에 지붕이 얹혀 있었고 그 위에 또다시 기둥이 서 있었다. 기둥의 2단 구조를 타고 맨 위로 올라가면 아까 보았던 커다란 돔형 지붕이 위치했다. 가까이서 보니 지붕은 백색보다는 연파랑에 가까웠다. 저 지붕 위에도 작은 탑이 있고 탑 지붕 위에 청동색 성모상이….
어후. 높은 곳을 계속 쳐다보니 목이 아팠다. 이제 보니 지붕 못지않게 벽도 아름다웠다. 분명 건물 전체에 같은 색의 재료를 썼는데도 시야에 보이는 건물 중 가장 화려했다. 그러나 화려함이라는 단어가 주는 번잡함 혹은 사치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조각 하나하나가 각각 다른 형태였지만 전체적인 풍경만은 조화로웠다. 평생 종교가 없었지만 신이 존재한다면 이런 곳에 기거할 것 같았다.
성당에 들어서니 햇살이 온몸을 덮었다. 사방으로 난 창문이 조명 하나 없이도 성당 내부를 환하게 밝혔다. 성당 중심부의 바닥 무늬가 상당히 복잡했는데, 가운데 원을 중심으로 몇십 개의 비늘무늬가 감싸고 있는 게 언뜻 회전하는 꽃 같았다. 천장은 팔각형 모양으로 솟아 있었고 벽은 아치식으로 뚫려 사방을 훤히 볼 수 있었다. 조그만 광장 같은 형식이었다.
성당에는 여러 공간이 있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조각이 세워진 곳이었다. 성당의 가장 깊숙한 공간에 여럿이 뒤엉긴 조각이 있었다. 조각 주위에는 불이 드문드문 켜져 있었다. 중심부에서 새어오는 햇살 덕에 모든 공간이 어둡지는 않았지만 이곳은 조명을 여러 개 켜놓은 덕에 유난히 밝고 따뜻했다.
그러나 내 눈에 들어온 건 사람들의 구도였다. 한 여인이 아이를 안은 채 자애로운 미소로 아래를 내려보았고 여인의 발치에서 사람들이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그녀를 동경하는 사람, 공포에 질린 얼굴로 달아나다 날개 달린 아이에게 공격당하는 사람, 그녀에게 매달린 날개 달린 아이들, 아니, 천사인가? 그때 내 옆으로 누나가 걸어 왔다.
“아까 전부터 이거만 보고 있네.”
“응. 뭔가… 계속 바라보게 되는 느낌이야, 어.”
“흑사병 때문이야.”
어? 나는 뜬금없는 소리에 누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나는 조각을 바라보며 담담한 얼굴로 설명을 이어갔다.
“1630년경 베네치아에서는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어. 예술과 무역의 중심지였던 만큼 많은 사람이 오갔으니까.”
“흑사병 때문에?”
“응. 그래서 사람들은 흑사병의 퇴치를 기원하기 위해 신께 바치는 성당을 지었어. 그게 여기고. 성당이 완공되기까지는 50년이 걸렸지만, 공사를 시작한 후 흑사병이 수그러들어 성당에 특별한 의미가 더해졌지.”
“그럼 저 사람들은?”
“저기 오른쪽에 도망치는 게 흑사병이야. 왼쪽에서 신께 간청 중인 여인이 베네치아를 상징하고.”
“아….”
그런데,
“누나는 이런 걸 어떻게 아는 거야?”
“역병을 물리치려면 무언가가 필요한 걸까?”
누나는 여전히 내 쪽에는 시선을 일절 주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담담하다 치부했던 얼굴이
이상했다. 꼭 내가 아는 누나가 아닌 것 같았다. 누나는 감정을 잘 숨기는 편이었지만 그건 자신의 감정 위에 다른 가면을 덧씌우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누나는 아무 칠도 하지 않은 순백의 도화지처럼 어떠한 신호도 읽어낼 수 없었다.
“사람들은 위기를 마주하면 뭐라도 하잖아. 건물을 짓거나, 의식을 치르거나, 하다못해 기록이라도 남기거나. 그런데 아무도 위기를 알아채지 못하면 어떡하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면. 아무런 준비 없이 재앙을 맞이한다면…… 그래도 세상은 계속됐겠지.”
“누나! 왜 그래?”
누나, 아니 잠뜰은 그제야 나를 보더니 현실로 돌아온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잠뜰은 잠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피곤하다는 듯 말했다.
“미안. 나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어……응.”
누나가 떠난 뒤에도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누나가 떠난 빈자리는 왠지 누나가 오기 전보다 더 휑했다.
누나,
아까는 뭐였을까? 나는 잠뜰이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처음 봤다. 아니,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 자체를 처음 봤다. 중얼거리며 랩을 하듯 쏟아내는 발화. 이해할 수 없는 가정들. 감정이 이성을 밀어내고 있었다. 불안, 혹은 두려움? 어떤 감정에 지배당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누나답지 않았다. 그러나 이성적 판단을 내리기도 전 내가 느낀 것은…공포. 나는 단순히 처음 겪어보는 현상에 당황한 게 아니었다.
잠뜰의 두 눈동자. 현실이 아닌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초점 없는 한 쌍의 눈. 진갈색으로 반짝이던 두 눈은 그늘에 흐려져 안광 없이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그건 단순한 색 중 하나가 아닌 무언가를 담고 있는 듯한, 어쩌면 어떠한 커다란 일에 휘말린, 다른 세계를 바라보는 누군가의 잔상….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거야?
99/12/29 18:00
누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돌아왔다. 오히려 아까 전보다 더 쾌활해 보였다. 내가 무어라 묻기도 전에 누나는 갑자기 피곤을 호소했다.
“아, 피곤하다. 숙소 잡은 데 있어?”
“있긴 한데….”
“그래? 그럼 거기 가자.”
“누나, 잠깐만.”
나는 냅다 앞장서는 누나의 팔을 붙잡았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던 거야? 계속 여기에 있었어? 애초에 여기는 왜 온거야.”
“….”
“제발, 이제 설명 좀 해줘.”
“라더야.”
누나는 내 눈을 똑바로 마주하더니 조용하게, 그러나 글자 하나하나를 꼭꼭 씹어 삼키듯 명확하게 뜻을 전했다.
“나중에. 나중에 알려줄게. 지금보다는 언젠가….”
“지금은 안되는 거야?”
“응. 지금은 아냐.”
말을 꺼내자마자 거절해 버리는 단호한 모습에 순간 서운했지만,
“알았어. 조만간 꼭 얘기해줘.”
난 누나의 뜻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누나의 말은 늘 옳으니까. 분명 무슨 사정이 있었을 테다.
“따라와. 숙소 안내해 줄게. 조금 누추하긴 한데… 급하게 잡아서. 미안.”
“응. 가자.”
시간은 많으니까…
99/12/29 ??:??
당신은 내가 외면한 슬픔의 총체인 걸까.
우리는 아름다운 종류의 괴물을 천사라고 부르기로 합의했는데.
우리가 영원히 깨어날 수 없다는 말에 동의해 줘.
─ 양안다, 「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 中
99/12/30 ??:??
누나가 보이지 않는다.
분명 방에 들어온 후 누나는 침대에서, 나는 바닥에서 잤는데. 내가 불을 끄기 전 누나가 이불을 덮는 것까지 봤는데. 잘자, 라고 인사하면 옆에서 소곤거리는 투로 인사가 돌아왔는데.
새벽에 깨어나 보니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손을 뻗어 만져보면 시트는 온기 하나 없이 차가웠다. 사람이 나가는 기척 따위는 전혀 느끼지 못했고. 생각해 보면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누나가 사라졌던 1년 전. 그때도 새벽이었다.
98/12/28 ¿¿:¿¿
누나. 어디가?
─ 아… 라더야. 깼구나.
지금 새벽인데. 편의점이라도 가게?
─ 음, 그건 아니고.
그럼?
─ 라더야,
“─ 누나는 천사를 만나러 갈 거야. 아직 아침이 이르니 좀 더 자.”
새벽의 창백하고 시퍼런 박명 사이로 현관문을 열고 사라진 누나. 그 말을 하던 잠뜰의 표정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깊고 진한 슬픔만이 가슴 한편에 고여 맴돌 뿐.
99/12/30 02:40
그때와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그날 잠에서 깨어 빈 침대를 바라봤을 때 무슨 생각을 했던가. 어쩌면 그때부터 모든 걸 예상했는지도 모른다. 종말을 미리 예언한 선견자처럼 나는 직감했다. 누나는 떠났구나. 그리고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때도, 지금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운명의 수레바퀴에 짓밟힌 채 무력하게 결말을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다만 그때,
끼익─
“깼어? 얼른 다시 자. 늦었다.”
“잠뜰,”
“화장실 좀 갔다 왔어. 깰까 봐 조용히 갔다 왔는데…. 하하, 소용이 없었구나.”
문 틈새로 복도의 노란 불빛이 들어왔다. 어둠에 적응된 눈은 밝은 곳을 바라보기 힘들었다. 그래서인가. 마치 1년 전처럼, 누나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알았어. 누나, 잘 자.”
나는 이불을 도로 뒤집어쓰고 누웠다. 옆에서 누나가 다시 잠을 청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상한 예감만은 도저히 가시질 않았다. 심장이 빠른 속도로 두근거렸다. 누나의 기척 소리가 멎자 방 안은 내 심장 소리로 가득 찼다. 쿵쾅, 쿵쾅. 누나에게도 이 소리가 들릴까? 쿵쾅, 쿵쾅. 내일은 어떻게 되는 걸까? 쿵쾅, 쿵쾅. 잠뜰은,
도대체
뭘까.
99/12/30 09:00
열이 났다. 긴장으로 밤을 새워서 그런지, 안 하던 외출을 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마가 불에 데인 것처럼 뜨거웠다. 괜찮아? 이마를 짚는 잠뜰의 손이 서리처럼 차가웠다. 괜찮아. 조금만 쉬면 돼. 어차피 해외라 병원에 갈 수도 없었다.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누나는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물에 적신 수건을 가져왔다. 바닥에 눕지 말고 침대로 가서 누워. 나는 얌전히 누워 누나의 보살핌을 기다렸다.
“악, 차가워!”
내가 소리를 지르자 누나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지금 환자가 놀랐는데 웃겨? 간호사로서 최악이야….
“아니, 이 정도로 차갑게 하면 어떡해!”
“일단 화장실에서 가장 차가운 물로 틀어보긴 했는데…. 이렇게 얼음장 같을 줄은 몰랐어!”
“온도 체크를 하고 왔어야지….”
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구시렁거리자 누나는 다시금 웃었다. 실내에 청량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나가 웃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슬로우 모션으로 틀어졌다. 창문 너머에서 날아온 정오의 청색 하늘이 이불 위에 내려앉았다. 오늘의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맑음. 방에 들인 햇빛 사이로 공중을 부유하는 먼지 조각들이 보였다. 누나는 내 이마에서 물수건을 도로 집어 든 채 눈을 접으며 웃었다.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맑게 그렇게.
‘아, 진짜.’
애써 토라진 표정을 유지하던 나도 종국엔 표정을 풀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해. 진짜로….
99/12/30 16:35
“누나, 아니, 이게 뭐야?”
“어때. 멋지지?”
나는 자랑스러운 투로 말하는 누나를 경악하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미쳤나 봐. 아까 물어볼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는데.
내가 열에 취해 비몽사몽 중에 있던 동안 누나는 내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알아보았다. 그러다 누나가 건넨 질문에 내가 뭐라 대답했지…? 일단 이 사태가 일어난 걸 보아하니 대강 타본 적 없다고 대답한 거 같은데….
“짜잔. 곤돌라! 오늘 저녁 동안 탈 수 있어.”
“Ciao.”
차, 차오…. 이까지 드러내며 활짝 미소 짓는 이탈리아 아저씨를 보며 나는 1년간 방구석에 처박아놨던 사회성을 간신히 끌어와 인사했다. 애니에서만 봤던 기다랗고 평평한 배가 내 눈앞에 있었다.
실제로 본 곤돌라는 상당히 길었다. 분명 화면에서는 사람 두세명 정도만 누워도 모자랄 길이였는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곤돌라는 다섯 명은 누워야 길이가 맞을 것 같았다. 곤돌라는 모든 부분을 검은색으로 칠했고 양 끝이 멕시코 모자의 챙처럼 말려 올라갔다. 가운데에는 승객이 앉는 좌석 세 칸이 있었고 맨 뒤에서 아저씨가 흰 모자를 쓴 채 노를 저었다.
“나 오늘 아침에 앓아누웠는데? 지금 환자한테 이래도 돼? 내일도 있잖아.”
“아저씨 기다리시잖아! 얼른 타.”
“알았어….”
이거 뒤집히지는 않겠지? 나는 불안하게 발을 디뎠다. 아저씨는 하얀 ‘이빨 미소’를 유지한 채 날 바라보았다. 욕실 청소용품 포장지에서나 볼 것 같은 미소가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나는 어찌어찌해서 곤돌라에 앉는 데 성공했다. 누나는 어떻게 타는지 구경하려 했는데, 웬걸, 누나는 단숨에 곤돌라에 앉았다. 대체 뭐야, 무슨 현지인이야? 이쯤 되니까 내가 미쳐버린 것 같았다.
“자, 출발!”
곤돌라가 수로를 두 갈래로 가르며 힘차게 움직였다. 바람이 불어왔다.
99/12/30 17:00
“근데 누나.”
“응?”
“왜 하필 지금같이 애매한 시각에 탄 거야?”
“있어~”
허.
“그럼 이것만 답해줘. 지금 어디로 가는 거야?”
“그것도 비밀. 근데 거의 다 왔어.”
“주변에 물이랑 빽빽한 건물밖에 없는데 도대체 어디가….”
내가 사방의 모든 것을 의심하며 둘러보던 중 누나가 외쳤다.
“라더야, 저기 봐!”
“…와.”
천국이 지상으로 내려온 순간이었다. 배가 좁은 수로를 벗어나 강으로 나아가자 드넓은 세상이 단숨에 들이쳤다. 나는 태어나서 본 것 중 가장 넓은 하늘 아래에 있었다.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시야의 끝부터 끝까지 색으로 가득 찼다.
해가 추락하는 수평선 끝부터 달이 비상하는 반대편 수평선 끝까지, 벚꽃의 연분홍색과 라벤더의 연보라색이 뒤엉키고 서로를 물들이며 넓게 퍼졌다. 숨이 막힐 때까지 가득 세상을 호흡했다. 눈에 담을 수 없을 때까지 가득 세상을 유영했다.
사방에서 곤돌라를 탄 사람들이 이동했다.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물길이 생겼다. 이 도시의 사람들을 지지 해주는 파도가 발밑에서 출렁거렸다. 낮에는 하늘을 닮아 한없이 푸르던 물이 노을을 입자 청록색으로 변했다. 파도의 움직임을 따라 유리 파편처럼 반짝이는 빛들이 흩어지고 모이기를 반복했다.
“어때?”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미소 짓는 잠뜰이 보였다. 누나의 뒤로 우리가 지나온 베네치아 거리가 한눈에 담겼다. 베네치아에서 우리가 처음 만난 산 마르코 광장, 초코 젤라또를 먹었던 벤키, 조각을 본 살루테 성당, 우리가 방금 떠나온 숙소까지. 이 모든 것이 모인 도시야말로….
“베네치아. 내가 아는 장소 중 가장 매혹적이고 사랑스러운 도시.”
누나는 내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처음 언어를 뱉어보는 듯 한 자 한 자 짚어가며 천천히, 그러나 마음 속에서는 이미 수백 수천 번 연습했던 것처럼 공들여서.
“너에게 이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어.”
잠뜰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거울처럼 대화의 상들을 비추었다. 갈색 눈동자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있다는 듯 투명했다. 반면 그 안에 담긴 빨간색 눈동자는 감정들의 덩어리로 엉켜 어두웠다. 그래서 내 뜻을 알 수 있었고, 그래서 누나의 저의를 읽을 수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깨달았다. 누나야말로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잠뜰이야말로 운명의 수레바퀴에 짓밟힌 희생양이었다고.
99/12/30 21:30
“오늘 돌아다니느라 피곤했지. 이제 자. 약 먹고.”
누나는 물컵과 알약 한 정을 건넸다. 뭘까, 저 약은. 갑자기 어디서 난 걸까.
“아까 씻는 동안 구해왔어. 아무래도 피로할 테니까…. 도움이 될 거야.”
나는 가만히 잠뜰의 손을 내려다봤다. 가로로 긴 장방형 백색 알약 위에는 영문이 적혀있었다. 그러나 워낙 작아서 위에서 내려다볼 때는 읽히지 않았다.
나는 한 손으로는 알약을, 또 다른 손으로는 물컵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단숨에 삼켰다.
“어, 이제 자야겠다. 누나도 잘 자. 누우면 불 끌게.”
침대로 걸어간 누나가 이불을 펼쳤다. 누웠다. 이불을 덮었다.
나는 그 모든 모습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불 끌게. 잘자, 누나.”
“잘자, 라더야.”
99/12/?? ??:??
내가 내 문제를 끝낼 수 있게 도와줘.
우리는 혼절한 단어를 너무 많이 받아 적었잖아.
─ 양안다, 「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 中
99/12/31 11:30
머리가 울렸다.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망치로 머리를 사정없이 내려치는 듯한 두통이었다. 나는 어젯밤 마시고 남은 물을 찾으려 바닥을 더듬었다. 아, 찾았다. 물이 들어가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돌아보는 내 시야에 종이 한 장이 걸렸다.
라더에게.
편지를 읽은 후 나는 외투를 걸치고 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99/12/31 12:00
20세기의 마지막 날 베네치아는 분주했다. 산 마르코 광장은 12시간 후에 있을 새해 카운트다운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시야에는 온통 웃고 떠들며 한세기를 마무리하는 사람들만 가득할 뿐, 내가 찾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어떤 말로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 말도 안 되는 일을 내가 너에게 잘 전할 수 있을까. 말한들 네가 믿을 수 있을까. 나도 믿지 못했던 진실을.
시원한 바람이 외투 곁을 스쳤다. 어느새 이 온도에 적응했다. 베네치아의 겨울은 영상이었다. 지금은 평생을 살아온 한국보다 따뜻한 베네치아가 더 편안했다.
그러나 가장 먼저 말하고 싶은 건, 누나는 절대 라더 너를 버리고 도망간 게 아니야.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설령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해. 하지만 정말,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어…. 네가 무엇을 느꼈던 진심이 아니었어.
타지의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과거의 편린을 찾아 헤메는 이상한 개체. 이곳에서 내가 알았던 세상의 흔적을 나는 찾고 있다.
그리고 베네치아에 온 이후 이상한 행동들로 너를 놀래킨 것도 미안해. 설명하지 못해서 더욱. 나는 한국을 떠나온 이후 한 가지 고민에 몰두해 있었고, 그걸 네 앞에서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어. 아마 네가 알았다면 말렸을 테니까.
이곳에는 그 사람이 없다. 분명 함께한 장소 중 한 곳에 있을 것이라 판단했는데 그가 이곳에 다녀갔다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없었다. 내가 착각한 건 아닐 것이다. 나는 빨리 다음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모든 것이 아득해지기 전에.
99/12/31 13:00
“Ecco a lei, signore.”
“Thank you.”
“Buon appetito.”
나는 고개를 내려 내 앞에 놓인 스파게티를 바라봤다. 내가 앉은 테이블 주위를 둘러봐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러니까 내가 이상한 사람 같잖아. 자꾸 주변을 살피니 사람들이 나를 수상하게 쳐다보았다.
1년 전에 한 말 기억나? 천사를 만나러 간다는 말. 반은 맞고 반은 틀려. 그래. 차라리 내가 천사라고 하면 맞을까….
나는 포기하고 얌전히 스파게티를 먹었다. 온갖 가설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대개는, 음. 차라리 구체화하지 않고 싶었다. 그 사람은 어떻게 혼자 견딘 건지. 베네치아에 오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오늘까지 나한테는 언질조차 없던 내용들.
누군가를 실제로 만난 건 아니야. 어느 날이었던가. 오래된 이야기들을 읽게 됐어. 다른 시대, 다른 장소를 배경으로 한 비슷한 이야기들. 처음에는 그저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우연이 계속 반복되는 거야.
꼬리에 꼬리를 문 상상이 이어졌다. 버거웠다. 짊어지기 버거워 고개가 내려갔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역시 내가 잘못한 걸까.
언어도 다르고 접점도 없는 사람들이 입을 모아 같은 내용을 말했어. 더 깊게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모든 내용은 같은 지점을 겨냥하고 있었고 답은 명확해졌어.
“잘 먹었습니다.”
나는 의자를 밀어 넣고 식당을 나왔다. 하늘이 밝았다. 아직 아무것도 단정할 수 없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행동밖에 없다. 그렇게 되뇌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99/12/31 16:00
얼마나 걸었다고. 체력이 많이 안 좋아졌다. 하지만 견뎌야 했다. 그 사람을 만난 후에 쉬면 된다. 그 다음 일은 나중에 천천히 하면 된다.
내용은 이러했어. 세기가 끝나기 전, 아무도 모르게 어떤 선택이 반복되었다.
“Thank you.”
사람들은 위기를 마주하면 뭐라도 하잖아. 건물을 짓거나, 의식을 치르거나, 하다못해 기록이라도 남기거나. 그런데 아무도 위기를 알아채지 못한다면 어떨까.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면. 아무런 준비 없이 끝을 맞이하게 된다면.
직원이 건네는 아이스크림을 손에 쥐었다. 이름도 맛도, 이틀 전과 똑같았다. 여전히 부드럽고 쫀득했다. 그런데 지금의 내게는 달큰한 향조차 아무런 감흥을 일으키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더 이상은.
그래도 세상은 계속됐어.
예전에 알았던 모든 규칙들이 깨지고 있었다.
운하 건너편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담 안에 모여있는 백색 지붕과 황색 지붕들. 강을 건너는 배가 마침 도착했다.
이유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어. 다만 마지막 순간마다 늘 한 사람이 있었다는 말만 남아 있었어. 이름도 기록도 없이, 아무도 모르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배가 물살을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성당 내부는 여전히 환했다. 사방으로 난 창문이 조명 하나 없이도 성당 내부를 환하게 밝혔다. 꽃무늬가 바닥을 회전했다. 천장은 팔각형 모양으로 솟아 있었고 벽은 아치식으로 뚫려 사방이 훤히 보였다. 저쪽에 조각이 있었다.
이쯤 되면 너도 모든 걸 눈치챘겠지. 사실 널 베네치아로 불러온 편지는 내가 보낸 게 아니야.
타로 카드 10번. 운명의 수레바퀴. 너와 나는 그 밑에 깔려 있었어. 내 힘으로는 그걸 멈출 수 없었고. 한때는 네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도 했지만, 곧 단념했어. 너까지 이 진실을 감당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거든.
여러 존재가 뒤엉긴 조각. 여인이 아이를 안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그 아래에서 여러 사람들이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매달린 사람들. 간청하는 사람들. 달아나는 사람들. 역겨웠다. 왜 누군가 당신들을 구원하기를 기다리는 거야? 정말 구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면 자신이 직접 하라고. 한 사람의 몫으로 떠넘기지 말고. 창피하지도 않아?
그런데 무슨 일인지 분명 휴지통에 버린 편지가 사라진 거야. 그걸 알았을 땐 이미 편지가 발송된 후였고. 순간 패닉이 왔어. 너는 편지를 받은 순간 즉시 베네치아로 올 텐데.
나는 조각을 노려보며 고개를 치들었다. 그 사람이 옆에 없으니 너무 휑했다.
잠시간 고민하다 나는 결국 결심했어. 어차피 이뤄질 운명이라면, 내 스스로 이루어내야겠다고.
신이시여.
이것이 정녕 당신이 원하는 방식입니까?
99/12/31 17:00
곤돌라는 탈 수 없었다. 나는 이탈리아어를 몰랐고 수중에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제의 장소로 다시 뛰어가는 것이었다. 다행히 근처까지 육로로 충분히 갈 수 있었다.
마침내 베네치아에서 널 보게 된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어. 정말 그대로더라. 내가 떠나온 시간에 굳어버린 듯 내 기억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너. 올라간 눈매에 붉은 눈동자. 조금은 허스키하면서 짙은 목소리. 차마 기억에서 지우지도 못한 섬유유연제 냄새. 교실에서도, 꿈에서도, 하다못해 낯선 이들이 가득한 이방의 땅에서도 또렷한. 암흑 속에서 수백 수천 번 그려본 너. 라더 네가 내 앞에 서 있었어.
사방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20세기의 마지막 해를 보내주기 위해서. 지금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래서였어. 더 막무가내로 군 건. 평소대로 굴다간 너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것만 같았거든.
이 광경을 보며 천국 같다고 생각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드넓은 세상이, 하늘이 존재한다 해도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태어나서 본 것중 가장 연약한 세상 아래에 있었다. 색으로 가득 찬 하늘이 지금은 붕괴의 징조로 보였다.
성당에서 잠깐 멈춰 있었던 거 기억나? 너는 그냥 조용한 곳이라 생각했겠지만, 나는 그때 내 운명을 봤어.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개 낀 듯 어렴풋했던 미래가 그제야 확실해졌어.
해가 추락하는 수평선 끝부터 달이 비상하는 반대편 수평선 끝까지, 상처 입은 분홍색과 멍든 보라색이 패권을 다투고 서로를 해하며 피를 토해냈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차라리 눈을 찌르고 싶었다.
무서웠어. 도망치고 싶었어.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싶었어. 너랑 그냥 돌아가고 싶었어. 그래서 새벽에 혼자 일어난 거야.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
사방에서 곤돌라를 탄 사람들이 이동했다.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물길이 생겼다. 파도가 불안하게 출렁거렸다. 나름의 평온을 유지하려는 노력조차 황혼에 휘말려 제 색을 잃었다. 파도의 움직임을 따라 유리 파편처럼 날카로운 빛들이 흩어지고 모이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잠든 네 얼굴을 본 순간 모든 불안이 사라지더라.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어. 내가 아는 모든 것 중 가장 평화로운 장면. 가장 순수하고 고요한 사건. 네 미소가 없는 세상은 말이 안 되거든.
내가 지나온 베네치아 거리가 한눈에 담겼다. 외로이 찾아 헤멘 산 마르코 광장,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던 벤키, 신에게 항변한 살루테 성당, 추락하는 황혼의 바다까지. 이 모든 것이 모인 도시야말로….
그래서 베네치아에서 너와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거야. 베네치아는 내가 세계를 돌아다니며 본 장소 중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도시였어.
“베네치아. 당신이 아는 장소 중 가장 매혹적이고 사랑스러운 도시.”
나는 너에게 베네치아의 노을을 보여주고 싶었고, 너와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면서 걷고 싶었어. 그게 마지막일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 사람은 내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분명 처음 꺼내보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는 이미 수백 수천 번 연습했겠지. 이미 모든 걸 결심했으니까.
이건 거창한 일이 아니야. 세상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계속될 거야.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할 거고, 기억하지도 못할 거야. 어쩌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일 거야. 사람들은 새해를 맞이하고, 시간은 계속 흐르겠지,
나에게 이 풍경을 보여줄 때 어땠어? 두려웠어? 아니면 오히려 평온했어?
그거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발 밑의 파도에서 내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거울처럼 자신을 마주하는 상을 비추었다. 그 안에 담긴 빨간색 눈동자는 파도가 칠 때마다 흔들리고 부서졌다. 그래서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었고, 나는 차라리 그러기를 바랐다.
네가 내일을 맞이한다면 그걸로 다 된 거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깨달았다. 그 사람은 운명의 수레바퀴에 짓밟힌 희생양 따위가 아니었다. 잠뜰은 굴러가는 수레바퀴를 멈추기 위해 스스로 그 앞에 선 사람이었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이것만은 기억해 줘.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하늘이 어두워졌다. 어둠이 다가왔다.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99/12/31 天使의 時間
잠깐 잊은 꿈을 말해줄게.
그 꿈에서 우리는 온순한 짐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창문 밖으로 작은 나룻배가 적란운 사이를 떠다녔지.
당신은 악몽을 떨쳐내려 밤의 악보를 소리 내어 읽었어.
가라앉은 문장들이 우리의 목소리라고 하지 말아줘.
멀고 공허해. 텅 빈 공간도 망령으로 가득 차 있다고 믿었잖아.
별들은 오리온자리 배열로 빛나는데, 그래, 내가 잘게 흩어졌어.
─ 양안다, 「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 中
99/12/31 22:00
이리저리 헤메다 포스터 하나를 보았다. 그것을 보는 순간 머리에 불이 켜지는 기분이었다. 지난밤 얼핏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누나가 확실하지 않은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건 것처럼, 나도 이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어야 했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누나는 이곳에 있을 것이다.
99/12/31 23:30
산 마르코 광장은 새해 카운트다운 행사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가족과 함께 온 사람, 연인과 함께 온 사람, 혹은 친구와 함께 온 사람. 다들 옆자리에 누군가를 둔 채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들은 시끄럽게 떠들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저마다의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에게는 어떤 삶이 있을까. 한 사람당 하나의 세계가 있고 그것이 모여 하나의 우주를 이룬다. 그리하여 광장에는 수천, 수만 개의 우주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찾는 건 수만 개의 우주가 아니다. 내가 찾는 건 단 한 사람, 단 하나의 우주였다.
나는 내 우주의 전부인 그 사람을 지키고 싶었다. 설령 그 대가로 모든 천체가 멸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누나는 어디에 있을까. 산 마르코 광장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막상 누나가 이 넓은 광장 중 어디에 위치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한 밤색 머리카락이 보였다. 물론 같은 머리 색을 지닌 사람은 많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성적인 이유 따위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이것은 필시 운명이 내린 기회일 것이라. 나는 그를 움켜잡기 위해 뛰었다.
99/12/31 23:50
누나가 마지막으로 들어간 곳은 광장 북쪽에 위치한 시계탑이었다. 왜 하필 그곳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따라갔다.
시계탑 내부는 아무도 없이 고요했다. 전부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광장으로 나간 듯했다. 저 위쪽에서 한 명의 기척만 들려왔다. 나는 누나를 따라 시계탑을 올라갔다. 발소리가 그리 빠르지 않았던 거 같은데 이상하게 누나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시계탑의 마지막 계단까지 오르자 옥상으로 향하는 통로가 보였다. 저곳에 누나가 있다. 떨리는 마음을 추스르고 나는 걸음을 옮겼다.
검은 하늘이 보였다. 별 하나 없이 새카만 하늘이었지만 광장에서 올라오는 불빛으로 인해 시야는 온통 환했다. 군중들의 대화 소리, 빅밴드가 음악을 연주하는 소리, 누군가의 고함 소리, 행사를 준비하는 소리. 주위의 모든 소리가 귀에 엉켜 들어왔다. 하지만 내가 찾는 건,
“라더야, 왔어?”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음소거 되었다. 베네치아의 수많은 소리 중에서, 내 귀에 가닿는 소리는 오직 한가지 뿐이었다. 어느 때보다 나직하고 차분한 잠뜰의 목소리. 잠뜰이 날 바라보며 서 있었다. 시계탑 끝자락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지만 잠뜰은 맨 땅에 있는 듯 평온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게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지도 모르고.
“너라면 날 찾아낼 줄 알았어. 바라던 일은 아니지만.”
“누나, 내려와. 위험하잖아.”
이윽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누나는 대답 없이 사르르 웃어보였다. 가슴이 아팠다.
“편지 다 읽었지?”
“응.”
“네 잘못이 아니야.”
“그게 어떻게,”
말도 안 되는 소리.
“나 때문이잖아. 누나 나 때문에 이러는 거잖아.”
“….”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침착하게 말을 골랐다. 생각해라, 생각해. 서라더. 지금 누나를 멈출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나는 세상 따위 알 바 아니야. 난…이대로 세상이 멸망해도 돼. 난 괜찮아. 그러니까 하지 마.”
“미안, 그건 안 돼.”
“아니, 누나. 나는… 나는 바라지 않아.”
누나가 바라는 결말을.
“그럼 이건 온전히 내 욕심이겠네. 그치?”
누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그때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10
“라더야.”
9
누나가 말했다.
8
“난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7
“네가 다른 사람들과 살아갔으면 좋겠어.”
6
당장이라도 누나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걸음을 뗄 수 없었다. 움직여야 하는데, 지금 가야 하는데, 누나를 말려야 하는데….
5
“네가 다음 날의 햇살을 맞이했으면 좋겠어.”
4
“아냐, 누나. 나는….”
3
누나는 양 팔을 가로로 뻗었다. 바닥에 십자 모양으로 그림자가 졌다. 역광 때문에 누나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2
그제서야 발이 움직였다. 나는 누나에게 달려갔다. 안돼, 제발, 잠뜰….
1
“해피 뉴이어.”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곧이어 불꽃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함성을 질렀다.
하늘이 몇 번씩 밝아졌다 다시 어두워졌다. 빛이 파편처럼 흩어졌다. 베네치아 전역이 빛으로 물들었다.
모두가 기뻐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나는 텅 빈 시계탑에 주저앉아 이 모든 과정을 목도했다. 21세기의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