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것은 뭐라 해야 할까…… 이질적으로 생긴 인류?
일영이 실없는 생각으로 전두엽을 회전시키며 연 문에 얼결 걷어차인 사람 비슷한 것을 바라본다. 눈보라가 나부끼며 발치를 난도질하듯 이르는 중에도 속눈썹으로 시각을 덮어두고 나 몰라라, 한기는 느끼지도 못하는지 손끝만 서리 투성이 잔디에 벌겋게 언 모양에 검은 머리칼까지 살짝 덮고 실크로 된 로브를 투박하게 걸친 '저것'이 주어가 맞다. 물론 사람에게 이런 대명사를 붙여다 막무가내 쓰는 것이 영 격식있어야 마땅한 이름에 먹칠밖에 못하긴 하나 아무렴 일영에게는 사람이라는 것이 당치가 않아서 별 감상이 없으며 정확히는 사람 면상이 맞고 인류가 적확한 유전적 명칭인 데다 성인 남성 체구의 정상적 형성을 갖추었으면서도 그 내부의 것이 미미한 공포심을 유발하고 공허를 내포했다시피 느껴짐이라 할 수 있겠다. 눈꼬리가 둥글게 휘어 웃음을 자아낸 숙면에 가까이 보이기까지 한다.
저택에 딸린 정원 입구에서 이렇게 빈사 상태로 위치할 것은 무엇이고, 심지어 '저것'에게서도 미세하게 흘러나오는 마력이 있는 것 같고, 쩡가에서 어쩜 환대라도 하게 하려면 저 포마드 되다 만 게 따로 없는 머리 스타일도 손봐줘야 할 것이고…. 일영은 저것에 대해 셈 치다가 문득 십이월 모 지방의 한기에 저것이 잡아먹히기 전에 저 외지적 힘이 든 생명체에 대해 내부로 조속히 데려가야 한다는 사고를 뇌리에서 간신히 끄집어내나, 열한 살배기 아이에게 어깨 부축을 응용한 이동이 불가능함에 따라 로브와 같이 갓 짜인 직물 느낌이 강한 그것의 셔츠 자락을 체중 실어 끌어당긴다. 일영은 이런 양복 재질을 거칠거칠하다는 이유로 자주 손대지 않았다. 손끝 촉각이 다 곤두서는 느낌에 주먹을 떼어냈는데도 잔상이 거칠하게 남아 눈보라에 손가락을 뻗는다. 그가 동시에 '그것'이 살아있음을 느낀 순간에 체온이 낭자한 손가락 마디마디들이 일영을 도로 잡아들었다. 포물선을 그리는 기묘한 행각이 일영 앞에 기다란 그림자를 쌓아 올리듯 하는 '그것'은 입꼬리는 내리고서 홍채만 묘수가 머리에 든 책사처럼 빛내고 있다. 광명 봤냐고 물어보고 싶은 자태에 일영이 안면을 반사적으로 구긴다.
" 아까부터 계속 '그것'으로 부르시는데, 제 인명은 수현입니다. "
미소가 수현의 입꼬리를 타고 늘어진다. 함박웃음을 입만 꾹 다문 모습으로 짓는 꼴이 가상하다. 눈을 다시 스르륵 감는 수현을 보며 일영이 헛웃음을 참았다.
맑지 않은 밤하늘 사이로 거센 눈발이 그들의 머리만 가뿐하다는 듯이 연신 뒤흔들고 있었다.
메리 홀리 트롤리
일영에게는 상시라는 게 있다. 의식주를 갈아치우는 과정에서 불시가 생기긴 하나 귀납적으로나 연역적으로나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데 하늘에서 뭐라도 날아와 꽂히는 천벌 같은 시츄에이션은 개뿔도 있지 않았다는 의미다. 지극히 비일상적 존재의 등장으로 되려 찾아본 명제에 따라서는 정신영역에 간섭 가능한 모든 주술이 이 세상에 없고, 저것이 이 세상 것이 아니라면 집이라는 주축에 무게중심 두다 목 여럿 날릴 게 분명하므로 시일 내 숨이라도 죽이게 만들어야 하는 게 옳다는 것이 생각의 대부분이었는데, 요점은 '저것'이라고 퉁친 대명사를 성대 울려 말하는 일도 서면으로 직면하게 하는 일도 모두 하지 않았음에도 제 취급을 알고 있는 저 수현은 도대체 어디서 굴러온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수현은 커틀러리를 곧잘 쓰면서도 악수를 어느 손으로 받쳐야 할지 고민했고, 격식 있는 경어체를 술술 내뱉으면서도 열한 살 아이에다 귀족인 자신에게 눈높이를 맞추긴 커녕 우러러보는 구도를 친히 제공했다. 그리곤 주변 시종들에게 눈초리 한 번씩 묻어보고서야 세포 하나하나 뜯어 고치는 방식만 고수하는 이인 것처럼 눈꼬리를 이따금 접고 행동거지를 보수하는 것이다. 참으로 묘하기가 따로 없어 일영은 '저것'이 생자인지 망자인지 뭔지 의중을 알 수도 없다.
커틀러리에 대해 다시 돌아가자면 '저것'과 일영은 현재 식사를 들고 있다. 이유를 묻는다면 간단한데, 가주가 허가 내려 저택에 발을 들였고…로 시작하는 귀족 응접이다. 잠깐, 귀족 응접? 저딴 게 귀족이야?
" ……표정에 욕설 적으시는 게 다 보입니다. "
" 난생처음 보는 마법사가 식탁에 앉아서 내 뇌를 째깍째깍 들여다보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너 누군데? "
수현이 머뭇거리다 사자, 하고 말을 뱉는다. 일영은 모 고양잇과 포유류 생물—몸길이 이 미터에 평균 꼬리 길이 구십 센티미터, 어깨높이가 일 미터 가량인—을 먼저 떠올렸다가 '저것'의 머리에 달린 토끼 귀가 난센스가 아니면 안 된다며 박박 지운다. 사자로 칭할 것이면 친절하게 한자라도 옆에 덧붙여 줄 것이지. 신의 사자, 천사의 사자. 뭐 비슷한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 그럼 심부름 온 사유는 당최 무엇인지에 초점을 딸깍 맞춘다. 귀빈이어도 왜 굳이 우리 저택에 쳐들어오나 모르겠다. 격식 없다는 말이 따로 있지만 자기도 만만찮으므로 차치하고…. 일영이 포크를 내리 잘각대고 탁탁대는 사이로 자줏빛 손이 비집고 들어와 저지하나 금세 일영이 마력인걸 알아채자 분쇄하듯 사그라지게 내빼어진다. 계시가 내려왔으니까요. 수현이 짤막하게 답했다. 계시는 무슨 얼어 죽을 계시?
만물 오가는 데에는 다 쓸모가 수용되기 쉽게 붙는다고들 하는데 저것은 그런 것도 없나. 일영은 수현이 방긋방긋 웃는 법만 배운 사람처럼 벽 허무는 웃음을 식사 내내 사용인들에게 시시때때로 지으려 하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다. 너 뭐하는 인간이야? 질문이 철학적인데요. 담소라기에도 뭐한 대화만 듬성듬성 빈 식탁에 내리꽂힌다. 수현이 뚫어지게 일영을 쳐다보더니 담담히 입을 열었다.
" 도련님은 잘나신 것 같습니다. "
그 앳된 나이에 마력량도 많아 보이시고…. 수현이 말꼬리를 덧붙이곤 싹둑 자르듯이 눈썹을 동그랗게 말았다. 일영이 흠칫하다 눈을 내리깐다. 뭐? 저게 칭찬인지 아부인지 빌어먹을 화법에 비하는 고도의 놀림인지 알 길이 없다. 단어 상태가 손볼 데가 여간이 아닌 것 같음에 더해 사회성이라곤 넉살 좋은 웃음 외에 탑재된 것이 없다시피 하는듯하다. 사람 아닌 건 알겠는데 이런 식으로 반인격적으로 굴 데가 참 기분 상하게 해놓고 발뺌하는 족제비도 아니고……. 일영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지그시 자신만 주시하는 수현에게 쏘아붙인다.
" 언어 선택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드냐? "
" 네? 뒷배경이랑 재능이 태생에 잘 나왔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시지 않으셨나요? "
일영이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저 자식은 사회랑 격리된 천사한테서 온 사자인가? 참으로 당황스럽다. 그래서 지금까지 얻은 정보라고는 1. 빌어먹을 사자. 2. 모종의 이유로 몹시 귀하신데 쩡가까지 걸음을 하셨다…… 까지가 전량이며 심지어는 속히 꺼져줄 생각도 없어 보인다. 가주한테는 도대체 어떻게 설득을 받았길래 군말 없이 일 대 일 파인 다이닝 자리를 흔쾌히 내 주는지? 물론 여기서 하나의 일은 일영이고 나머지 일은 수현이다. 빌어먹을…. 냉혈한도 아니지만 쩡가 체면이 있지 어느 정도 사자길래 마법으로 알아주는 저택을 미개봉해서 다행이라는 새 물건처럼 내놓는지 모를 일이다. 그 와중에도 수현은 그 몇 분의 정적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연다.
" 시대의 경제적 배경 얘기라도 해볼까요? 요즘 주식시장의 선풍적인 인기를……. "
열 살배기한테 뭘 바라는 건가? 물론 자신은 세상만사 치인 애늙은이란 평이 어울려 나잇값 반대로 먹은 처지긴 하나 저 자식은 그 이슈 코빼기도 모를 텐데? 일영이 속말로 투덜대며 눈가를 좁혔다. 날카로운 금발이 흘러내려 막 눈두덩이를 찌르려던 차에 또 보라색 손이 불쑥 튀어나와 머릿결을 빗질하는 것 비슷한 형식으로 다듬었다. 뭐야 이건? 일영이 안 그래도 좁은 눈가를 이제 책장 구석처럼 좁아지게 만들고 있자 수현은 그제야 마력을 거둔다. 저딴 게 빗질이라니 무슨 자연적 마력으로 물리력도 행사하게 생겼다.
" ……그래요, 그러시겠죠. "
뭘 봐. 딱 그 정도의 눈빛을 일영이 번뜩거리다 만다. 정신연령 똑바로 박힌 애 취급 해주는 것도 정도가 있다는 둥 말하는 낌새가 없는 것을 보아하니 그냥 차력으로 저딴 사담에 의해결론을 맺은 것이 틀림없다. 애초에 누가 그 나이 외관 보고 그런 말을 해? 화법부터 좀 익혀야 어떻게든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택에서도 이렇게 실실 웃고 다니면 체면 구긴다는 소리 못 들어봤을까? 당연히 못 들어봤겠지…. 일영이 속으로 푸념만 줄곧 꺼내는 사이에 수현은 또 방긋거리면서 인위적인 미소를 얼굴에 펴 바르는 도중 하나 잊었다는 듯이 덧붙인다.
" 그리고, 내일부터 제가 도련님 가정 교습을 담당할 겁니다. "
일영이 티스푼을 슬슬 젓다가 대꾸하려 멈춘다. 그래, 가정 교습…… 가정 교습?
" 네가? "
*
제정신인 일상을 빼앗겼다.
일영은 마법 교습에 관심이라곤 티끌도 없고 이제는 사뭇 타인의 기억으로 느껴지기조차 하여 가족애 하나 있지도 않은 집 안에 거주함이 현재이며 연마된 실력에 기반해 나름 성씨 관한 구설수는 발끝도 안 끼칠 정도의 능숙함으로 마력을 출력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제 와서 가정교사라니?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온다. 사자라고 덥석덥석 일거리를 퍼주는가 반문하자니 자식 얼굴보다 학회가 먼저인 그치들이 수현이라고 다를 게 있느냐 싶어 '사자님 마음대로 하라' 같은 소리나 지껄인 것이 눈에 훤하다. 그래, 황궁 우편도 일주일이나 썩어있었다. 이 염치 불고하고 절을 해도 모자랄 판에 불을 붙여? 사자가 온다면 언질이나 줘야지 길바닥에서 버티게 두는 건 말이 되지 않고 되고의 문제가 아니라 비로소 멸문의 문제다. 수현이 협조적인 편이라 다행이지 복수의 화신이라도 왔으면 그날 식사는 스테이크가 아니라 쩡가였다.
일영은 학회 방문 일정에 사로잡혀 떠난 이들의 텅 빈 사무실을 습관적으로 찌푸린 눈으로 훑는다. 자녀라고는 일영이고 외에는 전무이면서 어쩜 피가 물보다 옅은 짓거리는 꼭…. 아홉 살에 세상 이치 싹싹 쓸어 담고 열한 살에 어른처럼 구는 아들이 있으면 정황을 파악해야지 가주직 빨리 넘길 궁리나 굴리고 있다. 일영의 어깨 위로 보라색 무언가가—형체라곤 물리력 외에 느껴지지 않는 것이 필히 조악하게 뭉쳐놓은 마력이었을 것이다—오른 것이 그때였다.
" 세상에, 언제부터 여기 계셨어요? "
" 와, 너는 언질을 좀 하고 나타날 수 없냐. "
" 발소리 들으시면 잘 듣고 아시면서 뭘…. "
" 뭔 소리야. 난 토끼 귀도 없어서 잘 안 들려. "
어휴, 너는 그리고 사람 어깨 잡을 때 손을 좀 써라. 일영이 뒤지던 장부를 덮고 질렸다는 표정으로 허리춤 주머니에 꽂혀있던 아티팩트를 꺼냈다. 자연물 생성용. 원소 분자를 이래저래 끼워서 맞춰 밀랍 고형에 틀을 짰다고는 하는데 통상적으로는 가정용으로 쓰이면서도 해체 작업 성공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건드는 것마다 죄다 파손의 극치를 달림에 따라서 자료 몇 개도 화기 가까이 댄 것 연상되도록 태워봤으며 값비싼 랩실을 숯 마찰이나 연거푸 한 것처럼 만든 것도 실기라 치면 실기다.
" 좋은 거 쓰시네요. "
알 바? 습관적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무례함을 짓누르며 일영이 헛웃음을 짓는다. 신문물이라곤 자기 껍데기까지가 아는 전부일 것 같은 사자가 잘도 가정교사를 하겠군…. 여기까지 오니 이제는 가주 인장이 도난당한 건 아닌지 합리적 의심이 싹튼다. 이 정도면 집무실 한편의 완드 무더기처럼 마력 발산만 가능한 개체 아닌가 일영의 의구심이 솟아오르는 와중 그냥 수현이 졸병 사자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래, 말단이 틀림없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인간 문물 적응에 유기적 사고가 힘들겠서로니 왜 나를 그 정도 취급하느냐 싶은 얼굴로 수현이 얼빠진 표정을 내었으므로 일영은 말단 사자들은 원래 자존심이 세다는 확증을 못 박고 세운다.
" 진심이신가…. "
" 지금 나한테 존댓말 하는 거 봐라. 기품이 어디로 도망가서 안 돌아오디? "
" 그럼 반말을 할까요. "
" 너는 진짜…. "
역정이 내고 싶어지는 대화다. 잘 생각해. 상대 얼굴 정돈 읽고 답변 토스를 해야 하는 거야. 문제는 이 말 듣는 주체가 실질적으로 0살 배기에 불과하다는 점이지만 그건 제하고서라도 이 자식은 교육이 필요하다. 지금도 수현은 집무실 보조 의자에 앉은 일영 앞에 오도카니 서서 내려다보는 위치를 점해놨는데, 무슨 요즘 시대 귀천은 없다지만 어린애가 앞에 있으면 눈높이라도 맞추는 게 일상적인 것이고 저 앞의 이가 사자라도 아니었으면 대가리를 콱 눌러 키를 줄여버리고도 남았다.
" 도련님, 생각 다 읽는 사람한테 그런 폭력적인 사고를…. "
" 그럼 그 기능을 끄면 되잖아. "
" 그게 안 되니까요. "
" 오오, 그럼 무례하게 내 머리를 뜯어보겠다? "
패기 있군. 일영이 덧붙인 마지막 말에 수현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실성했다는 듯 소리 내 웃는다. 하여간 가정교사라는 게 정상이 아니다. 일영은 넘기던 자료 파일을 덮고 구석에서 완드 하나를 꺼내다가 수현에게 건넸다. 너 여기서 최선으로 할 수 있는 거 마법밖에 없지? 어, 그래 보여.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수현이 함구하고 있자 일영이 의자를 슬며시 끌어 일어난다. 일영이 펼친 왼손 검지가 대련장 비슷한 곳으로 향했다.
" 네 마법 실력이 어중이떠중이면 곱게 짐 싸서 나가야지. "
시험 관찰 외의 확증보다 연역적이든 귀납적이든 편의가 좋은 증명은 실재하지도 않는다.
*
보색이 애매하다면 시각적으로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최적의 에너지 소모법을 두고 일영은 각막을 곤두세우는 짓거리를 몇 분 정도 감내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야 수현의 마력이 보통내기가 아닌 것은 인지하고 있는 데에 더해 그저 관전 나름의 유희를 원하기 때문이다. 골렘 그런 거 필요 없고 그냥 위력만 보겠다지만 상식적으로 공격성 의도가 없는 유체에 어깨를 붙잡을 정도로 물리력이 강력하게 깃드는 것부터 무엇 하나 쉬운 게 있을 리가 없다. 자주 쓰지 않아 먼지만 훌훌 날리는 대련장 바닥에 일영이 죽겠다는 곡소리를 내며 앉는다. 수현이 완드를 매만지는 모습을 보아하니 딱히 도구를 가리는 것 같지는 않다. 완드 끄트머리를 짧게 손질하던 수현이 일영을 보고 잠시 멈칫하며 의구심 묻은 표정을 짓는다.
" …귀족 도련님이 그런 데에 앉아도 돼요? "
" 뭐라는 거야? 내가 그런 거 하나하나 따졌으면 이 저택에 사용인이 몇 백은 더 됐겠다. "
" 하기야 최소 인원 두고 텅 비어 있더라니…. "
이게 욕이야 뭐야. 눈을 일그러트리던 일영이 머리칼을 매만지곤 됐다는 듯이 시작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대련장 부수면 너도 같이 부서지는 거야…그렇게 말했더랬지. 턱을 손바닥에 궤고 무릎을 모아 딱 관람하기 좋은 자세를 만드니 훨씬 낫다. 수현이 가벼운 미소가 깃든 얼굴로 발을 무르더니 완드를 치켜든다. 힘든 척이라도 하지, 아주 사자라고…. 일영이 뒤로 쭈뼛쭈뼛 자리를 옮기자 그대로 폭음이 터진다. 무언가 영창하는 소음이 자잘히 유리가 파하듯 귓전을 아려 팡파레 소리나 축음기가 돌아가며 아주 공전을 하는가 싶어 일영이 귀를 텁 막아버리고는 눈만 치켜뜨나 일렁이는 먼지가 배로 늘어 시야가 흐린 와중 마법이 일렁이는 모양새가 시야에 어렴풋이 반사되며 동공이 칼잠 자다 눈 뜨인 사람의 것처럼 확장된다.
" — "
보라색!
처음 든 감상이 그것이었고 뒤로 이어지는 것이 꼴사나운 염증과도 같은 전율이다. 자취를 감춘 줄로만 알았던 마법학의 갈구 같은 것들이 시나브로 슬금슬금 상을 엎으러 가듯 올라오고 있었다. 군중에게 내보이면 저 사자는 화형이겠거니 싶으나 찬란함에 빗대서 영탄법이라도 내보이며 과장이라 함은 어디 서커스 보듯 취급할 수도 있겠다 하고 생각한다. 스위치 꺼진 회로에 불이 들어왔다. 이건 네 인생 종치기 전 마지막 기회고 저거 기필코 잡아야 한다고. 홀린 듯이 그런 사고가 치밀었다. 잘게 부서진 어휘를 가져다 붙여도 모자랄 판국에 경각심은 허물이 된 지가 오래고 그냥 열망이나 제대로 보이고 싶어진다. 콜록대는 소리가 성대에서 먼지 먹고 올라옴이 분명하나 개의치 않는다. 저런 마법이면 실험적 요소로 헤집어 분석하기 적합하다. 그 와중 애초에 쉽게 안 죽을 텐데 가문에 공헌시키라는 전언이라도 있어서 지상으로 왔나 어이가 없는 것도 동시다.
" …. "
" 천장은 안 부쉈어요. 비 막는 용도의 자재라더니 튼튼하고 좋네요. "
" 너 졸병 아니지? "
" 신 아래로 보면 머리는 다 아니죠, 당연히…. "
" 아니, 진짜 이런 인재가 뭐 하러 여길 왔어? "
이런 융통성 없는 신이 왜 또 남루한 마법사 사자인 수현 같은 걸 보냈나 싶어지니 사고를 그만하고 싶다. 너 유배라도 당했냐? 와, 비슷한 것 같은데요. 진짜 돌았나…. 안광이라곤 없는 얼굴로 뱅글거리니 속이 다 울렁거린다. 눈밭에서는 그래도 생기있게 웃었는데 이거 갈수록 진심 없는 미소만 학습하는 수준에 이른 것도 같다. 노동용 데이터베이스 모으는 것도 아니고?
" 너 진짜 낙하산이다. "
" 통과라는 뜻은 직접적으로 말하시는 게 의사소통에 도움이 될 텐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
" 그래 너 진짜 통과다. 진짜 통과야. 이제부터 가정교사 계약서 작성하러 가야 한다. 인장도 찍고 서명도 하고 네 인생을 내 교육에 갈아 넣어야 할 거야. "
거기까지 말하자 마음에 들었는지 수현이 웃음소리를 내며 빙긋 미소 짓는다. 아까보다는 생기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스산한 게 그냥 안면근육 조절법이나 익히는 데에 시간을 투자하게 시켜야 할 판이다. 그리고 관용어부터 차근차근 알아야 말을 하든지 말든지 하지 정말 답답해 죽을 노릇이었는데 참 잘된 일인가 싶다. 아까 날렸던 먼지바람이 무색하게 조용한 대련장 안으로 햇살이 드문드문 들어온다. 조만간 대청소라도 해야지 원…. 수현이 완드를 허공에 휘적대며 마력을 흩트리다 말을 던진다.
" 계약은 종신계약으로 하죠? "
" 지옥에 자진해서 두 번 걸어 들어가는 놈은 처음 보네. "
" 그럼 회개하면 됩니다. "
" 이제 대꾸에 성의도 없다 그래. "
*
일영이 수현에게 종신계약에 인장 찍게 한 다음날로부터 이 아티팩트는 뭔가요 도련님 말하는 데에서 그 아티팩트 만지시면 안 돼요 도련님 말하는 데까지 가는 데 겨우 3년 정도 할애했다. 수현이 넘실거리는 마력량의 뚜껑을 스태프로 절반가량 닫아버리고 이미 제가 가정교사라기에 제자의 연령이 수직을 그리는 그래프 보이듯 증가해 버린 뒤였을 때 그는 거의 비서였으며 또 다시 혈연으로 묶여 차기 가주 되시겠는 이들의 유년기를 보자 하니 어느새 눌러앉은 세상 이치가 좀 똑바로 보이기 시작했다. 수현은 대리 정치하다 파문 전까지 치달은 사람까지 제자로 겪고 나서야 종신계약이나 신의 전언이나 다를 바 없다는 무지막지한 결론을 내렸는데, 얼기설기 얽혀 직계 저택만 맡다 보니 그 세월이 한 세기 가량은 물론이고 꽤 훌쩍 넘긴 정도라 쩡가에서 골동품 취급받기가 능하다 못해 당연한 수순이었으리라 생각한다면 그 얼굴에 주름 한 갈피라도 잡히는 게 없으므로 불가능하다고 답할 수 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대를 쭉 따라가도 같은 얼굴이 없다는 사실은 차치하고 수현은 첫 제자 때에—일영을 가르치던 때에 시기마다 연거푸 바뀌어 자신의 얼굴에 일면식이라곤 1년씩 머물고 사라지던 사용인 중 하나가 마지막 인사치레 이후 7년 정도 지난 시점에서 저택 밖의 저를 보고 하던 말을 곱씹는다. 가정교사님은 정말 안 늙으시는 것 같아요……랬나? 그 이후로 마법을 여기저기 뿌려다가 쩡가 일원 열외에 있는 대부분의 외부인에게서 자신의 흔적을 대대적으로 표백하듯 지우고 다녔는데, 다 지워졌을 지는 몰라도 혈족들이 생계를 잇는 것과 노화가 다른 의의라고 생각해 본 이력이 없던 그는 일영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을 보고 웃는 것 외에 별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너는 평생을 살면서 아무것도 모를 거야…. 일영이 졸음에 밀려가고 없는 목소리까지 긁어모아 자신에게 말하던 순간에 수현은 평생 살지도 못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삶의 부여는 곧 죽음으로의 도주이며 추상화된 개체는 인식됨에 의해 종래까지 단일적인 의의를 갖지 못하면 살지 않는 것과 같다. 제자 하나가 품에서 떠날 때마다 역행의 감상이 떠오르는 데에는 단순 유전되는 눈 모양이라든지 DNA에 각인된 습성에 유사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든지 하는 것만 요인으로 자리 잡지 않는다. 수현은 몇 번이고 무수히 멸망하며 의식의 경계 외벽에 기대어 영원하지 않은 시간 동안 허물어졌다 다시 견고히 사라져간다. 호모 사피엔스가 젊음을 이렇게 유지하지는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 끝난 인생 같은 인생을 억겁에 걸쳐 번데기로 돌아가듯 억지로 재생시키기보다 늙어 죽는 게 더 신빙성 있다고 따지길 원했다. 물론 신은 강림하는 법이 없고 그는 영원하지도 않은 쳇바퀴에 본질적인 계약서 하나만 들고 무수히 뛰어들어야 했으며 이제는 시대가 하다못해 테크놀로지 어쩌구가 성행하기까지 한다. 영원한 것은 없고 수현은 변화의 기로에서 모든 것을 잃어 인계받은 시간만을 기계적으로 세며 반복하고 실행하고 학습한다. 연속적이지 않게 산다. 오직 기록의 커버 이미지로 작용하는 겉모습만 그들 사정에 맞춰 알아보기 쉽도록 한다. 혈육이고 본인이며 정신을 공유하는 유한성으로 계속해서 전이되는 것이라 수현은 전의 수현과 같음에도 상이하다. 영영 같은 전제는 없고 그는 평생이 아니라 상시에만 존재한다. 언젠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 몇 대의 제자가 혈족으로 내려오는 동안에 수현은 종종 이 인두겁의 첫인상을 떠올렸다. 가슴 어딘가에서 요동치는 심장이나 손 끄트머리로 추락하는 중력의 짓눌림이 영 생경한 풍경 아래에서 몸에 가득 차 쉬지도 않고 움직이는 꼴이 기이했다. 왜 생애부터 시작하지 않는지 어째서 추락한 모습이 다 큰 성인의 모습인지 스스로에게 묻는 일은 그다음이었고 눈꺼풀이 뜨여 흐릿한 시각이 뿌옇게 자리 잡았을 때 그는 오감이 꽤 제약적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땐…… 아마 삶이다. 그렇게 보였다.
젊음의 발단부터 말로까지 이대로 살 주관을 정신보다 육체가 먼저 갖추었을 때라는 감각이 든 차의 수현은 우주의 심혈관을 지끈 밟은 채로 동떨어진 만물들의 집에 축을 딛고 서 있다. 투시하는 대로 수용하기 나름인 저연령의 뇌처럼 주물러지던 실체가 단백질 비슷한 구색을 내어 희고 그 상체를 뒤덮은 섬유와 면직물은 뼈대에 맞추어 갓 지은 것처럼 빳빳하며 뒷전으로는 천둥번개가 부르짖듯 노크해야 한다는 사고만이 허공으로 구른다. 사전 지식과 관능적 인과관계를 차치하고 지식을 꾸역꾸역 사제 교육에 준하게 밀어 넣은 효과로 구직은 기대해 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출셋길은 터버린 망나니 육신은 아니니 다행이라고 볼 수 있는가? 딱히 아닌 것은 확언한다.
아아, 주여……. 딱히 신실한 사자는 아니었으나 이것과는 상호 약조라도 체결한 바가 없었다. 저의가 유배와 동의로 보이는 이 상황을 구속이라고 하면 알맞을 것이라 해두겠다고 그는 사고한다. 그래, 심신을 인류의 것으로 바꿔치기 당했다는 것이 옳다. 인두겁을 뒤집어쓴 채로 숨이 조여오는 것을 느끼며 그는 허공을 닮은 설원에 몸을 던진다. 한기와 성에가 손가락 사이사이 파고들어 깍지 끼듯 서로 열을 내며, 그제야 그는 자신의 표피가 따뜻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물론 옷 덕도 있겠지만.
그 뒤로 반대편 너머 거친 나무문이 열리며 그를 걷어차자 밖으로 발 한 짝을 내딛던 아이 하나가 흠칫한다. 뇌에서 굴러가 혀를 두른 말을 삼키는 몇 초 사이로 그가 말을 낚아챈다. 어린이들은 원래 머릿속이 훤한가? 이름이 일영인 것도 열한 살 먹은 것도 해파리처럼 다 드러내 보이는 정신머리가 가상했다. 수현은 자신을 '저것'이라고 찍찍 불러대는 피 안 마른 이에게 적당히 발음해 준다. 몸의 성대가 성치 못한지 말이 갈라지듯 속사포로 쏟아져 나왔다. 아까부터 자꾸 '그것'이라고 부르시는데, 제 인명은 수현입니다, 하고.
일영의 눈이 동그래지는 걸 보면서 당기지도 않은 입꼬리가 슬며시 호선을 그린다.
시각이 닿지 못한 멀리에서 선생, 하고 부르는 것만 같다. 하얀 눈 싸리가 조각조각 떨어지며 시시각각으로 분열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연속된 축에 엿보게 된 다음 세대가, 그다음 세대가, 또 그다음 세대가 사무치게 광명을 닮았다. 긍지에 다다른 와중에도 내 현황이랄 게 있을까? 저들이 중요하지. 무용한 여생은 무한하지 않음을 표방한다. 계속 살 수 없다는 의미다.
수현은 무한적인 계승에 경외를 표한다. 자신은 절대로 맞을 수 없는 종래까지 그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무한하지 않은 깨달음이 되며 그들의 사회에 단일적으로 녹아들어 다시 자신이 탈바꿈 될 때까지 결코 같지 않다. 유전되는 역사의 단면에 손 닿을 수 있는 건 참으로 축복이다. 이 가문이 조만간 풍비박산 나지 않는 이상 그는 모든 역사를 배울 수 있을 것이며 혈족의 이상을 갈구하는 마지막 날까지 다른 모습으로 사라져 갈 수 있다.
일영의 눈으로 수현 자신이 비친다. 이 비인간이 껍데기에서라도 그들의 모양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곧 생애를 학습한 나보다 철없고 말썽이나 피우겠지만 그 경애를 담은 시간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건 물밀듯 흘러오는 정보의 파편을 해체하는 작업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 다음 혈육은 누구인지, 마지막으로 맞을 그들의 혈육은 어떻게 죽는지까지 알 수 있음에도 굳이 알고 싶지 않아졌다. 그냥, 기어코 살다 죽는 것처럼 무지하고 멍청해지고 싶다. 인두겁을 거푸집인 마냥 뒤집어써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수현은 눈꺼풀을 다시 열었다. 평생에 걸쳐 확인하려면 계약은 종신으로 맺어야 할 것이다.
사나운 눈보라가 피부 윤곽을 발갛게 만들기까지 이르고서야 비로소 웃음이 입을 가르고 튀어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