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 전서 10:13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솔직할 단 하나의 고해성사를 당신께 전합니다.
그들에게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시편 115:5-6
20xx. 06. 30
안녕하세요?
음... 볼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이리 쓰려니까 뭔가 낯간지럽네요.
제 이름은 수현입니다. 올해로 스물이 되었고... 달리 쓸 얘기가 없어 민망하네요.
나는 일기장이자 내 유일한 친구가 되어줄 당신에게 모든 것을 가감 없이 털어놓기로 다짐했습니다. 부모님에게도, 신부님에게도, 하다못해 신에게마저도 솔직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하나뿐인 속죄...라고나 할까요?
갑작스레 이리 비장한 다짐을 하는 것이 웃기게 여겨질 줄 압니다. 당신은 비싸고 반짝거리는 일기장이나 다이어리도 아니고, 그저 주님 말씀이 몇 구절 적힌 노트이기에 더 그런 것도 같네요.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웃기는 비밀 하나 때문에 평생을 거짓말쟁이로 살아왔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내 모든 이야기를 들어줄 당신에게 나의 가장 큰 특징이자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웃기는 소리일 말을 해보려 합니다.
사실 난, 귀신을 볼 줄 압니다.
20xx. 07. 02.
저번 일기가 너무 급하게 끝났나요?
공책에 이해를 구하는 꼴도웃기지만... 부디 이해해 주세요. 이 이야기를 하면 백이면 백 나를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당신이 그저 종이 몇 장 엮인 공책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당신은 내 이런 말에 별 반박을 던지지 못할 테니까요.
귀신을 보는 것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도록 할까요. 그것들을 처음 본 건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어릴 적입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이런 걸 보는 줄 알았죠. 그렇잖아요? 다섯 살 짜리가 자기가 보는 세상이 남들과 다를 거라고 어떻게 생각했겠어요. 하다못해 그때까지는 내 부모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또래에 비해 의젓하고 예의 바르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라온 외동아들이 지나치게 자기 얘기를 하지 않았으니... 발견이 늦었던 건 뭐 당연한 일이었겠죠.
무튼간, 당신은 사람의 인생이 고작 말 한마디로 인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꼬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본 적 있나요?
난 아직도 내 인생을 대차게 꼬아놓은 나의 말 한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엄마, 저기 앉아 있는 아저씨는 왜 맨날 혼자 기도해?'
조용했던 여섯 살 짜리 애가 대뜸 이런 말을 한 게 사람들에겐 꽤나 충격이었나 봅니다. (사실 귀신을 보지 않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어 아직도 그들의 심정이 잘 짐작가지 않아요) 그날 이후로 내 인생에서 평탄함이라는 단어는 아예 찾아볼 수조차 없게 되었거든요.
부모님은 신실한 크리스천입니다. 내가 의지와 상관 없이 성당에 묶여 지내고 있는 것과, 당신의 정체가 주님 말씀 몇 구절이 군데군데 적힌 공책인 것도 그 이유이고요.
신을 믿는 부모님은 신념을 저버리면서까지 나를 위했습니다. 서양부터 동양까지. 모든 신을 찾았고 모든 신에 희망을 가졌죠. 매번 꼬박 성당을 다니는 신실한 이들이 제 아들을 위해서는 신념쯤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는 태도였으니... 말 다 한 거죠.
뭐, 보시다시피 변한 건 없었지만요.
통상적으로 이걸 신병이라고는 하나, 난 신을 받지 못했습니다. 신을 받기에는 내 신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고, 누름굿을 하면 내가 먼저 망가진다더군요. 내 인생은 이미 망가졌는데도요. 뭐, 내 부모에게는 불행이면서도 다행인 일이죠.
서양의 신도 동양의 신도,
온 하늘이 내게 침묵했습니다.
정말 어처구니없고 잔인한 일이지 않나요?
20xx. 07. 05.
성불도 지능순인 걸 아나요?
죽어도 성불하지도 않고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은 어딘가 미친 구석이 있습니다. 애초에 멀쩡한 귀신이 편한 극락을 두고 현세를 둥둥 떠다닐 리는 없지 않을까요?
성불을 하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해낼 수 없습니다. 뭐 어떤 신을 믿든, 그건 변하지 않는 저승의 이치와도 같은 것이죠. 근데 이 미친 귀신들은 내 몸을 빼앗으면 자기가 대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뭔지, 끈질기게도 들러붙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미 죽은 주제에 산 자보다 끈질긴 놈들. 난 살아서 그 끈질김을 견뎌야 했습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죠. 부적과 십자가를 동시에 지고 다니는 아이러니함은 어느새 내 일상이 되었습니다. 남들이 누리는 일상은 내겐 이상과도 같은 게 되었고요. 나는 문득 생각합니다.
온 세상이 나를 죽음으로 등 떠밀어도 침묵하는 하늘에게는, 나의 생존이 가장 큰 복수가 되겠구나!
하늘이 침묵으로 엿을 먹이면, 너는 하늘을 향해 쌍엿을 날려라.
이게 온갖 개고생 끝에 처절하게 살아남은 나의 인생 모토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요?
20xx. 07. 07.
웃기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 뭣 같은 저주를 끊어낼 방법을 찾은 것 같아요.
디어 마이 프렌즈
w. 스북
20xx. 07. 11.
저번에 너무 흥분해서 자초지종도 설명 안 하고 그냥 끝맺어버렸네요. 미안합니다. 그렇지만 너무 들떠있었거든요.
내게 성당은 집과도 같습니다. 그래도 주님의 가호라는 게 있긴 있는 건지, 주위를 메우는 시끄러운 귀신들은 웃기게도 성당에 들어오는 일이 잘 없더군요. 이게 구마라는 건가... 이유가 어찌 됐든, 내게는 기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만 언제나 예외도 있는 법. 가끔 기 센 놈들이 들어와 설치는 일이 있기도 합니다. 단상의 촛대가 쨍강 소리를 내며 떨어졌던 그날도 그런 줄로만 알았고요.
무시해야 하는 건 알지만...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까? 호기심을 못 참는 성정을 갖고 있다는 거. 호기심 다 참았으면 판도라의 상자도 열릴 일 없었겠죠. 무튼간, 어느새 내 눈은 소음의 근원지로 자연스레 가고 있더군요.
그리고, 그 존재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뭐야, 이무기 처음 봐?"
정말이지, 예의라곤 밥 말아먹은 작자가 아닐 수 없지 않나요? 잡귀처럼 생겨서 이무기라니, 그것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게 웬 말인지요.
가까이서 보니 군데군데 비늘 같은 것이 붙어있는 게 꽤 뱀 같이 생겨 한 마디 했다가 되려 호통이나 들었습니다. 아니 그럼, 비늘 달려있고 움직일 때 쉭쉭 소리 나는 데... 뱀이나 이무기나 그게 그거 아닌가...
그는 자신을 이리 소개하더군요. 이 몸은 감히 뱀 따위와는 비교도 안되는 이무기고, 이름은 공룡이라고. 솔직히 한숨밖에 안 나왔습니다. 어쩜 주변에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는지. 밖에 나가서 아무나 잡고 저가 이무기라고 얘기하면 다들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사이비인 줄이나 알겠지...
난 그에게서 몸을 돌려 성당을 나서려 했습니다. 좀 조용하게 있고 싶어 성당에 있었던 건데, 웬 시끄러운 이무기가 꼬인다면 얘기가 달라지니까요. 내가 저를 무시하고 나가려 하니 그가 당황해서는 쫓아오더군요. 자기 이무긴데 이렇게 갈 거냐고. 솔직히 그때는 그쪽이 이무기든 이무기 조상이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지만요.
그 순간, 전에 없이 지독한 물비린내와 함께 알 수 없는 이질감이 나를 덮쳤습니다. 내내 시끄럽던 평소와 달리 완벽한 고요를 맞은 세상. 주위를 꽉 메우던 답답한 영혼들이 싸그리 흩어진 듯한, 자유로운 느낌.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온전한 자유.
손이 전에 없이 떨려왔습니다.
"어디, 이제 좀 얘기해 볼 마음이 생기나?"
벙쪄있는 내게 공룡이라는 이무기는 그리 말했습니다. 신의 말씀을 전하는 단상에 기대어서는, 이 모든 게 꿈이라도 된다는 양 장난스러운 미소를 띤 채로. 그는 조용히 입 벌리고 서 있기만 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입을 비죽대며 툴툴대더군요. 좀 더 펄쩍펄쩍 뛰어보기라도 하라며.
예수상 앞에서 자신의 위대함을 설교하는 공룡의 꼴이 우스워야 정상인데도, 그 순간만큼은 저 촐싹대는 이무기가 나에게 있어 세상에 하나뿐인 신과도 같았습니다.
여타 전래동화가 그렇듯, 공룡은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였습니다. 그런 그가 내게 공생을 제안하더랍니다. 내 불완전한 신기를 가져가면 자기는 용이 될 수 있다나 뭐라나...
용이 되는 건 몇 천 년 동안 자신이 꿈꿔온 바였다는 이무기의 말을 들음에 입이 바짝 말라왔습니다. 오후의 햇빛이 스미는 색유리 너머로 오밀조밀 새겨진 신의 이야기가 보였거든요. 몸을 내어주고, 피를 흘리고, 구원을 약속하는 장면들...
그 아래, 건방지게 짝다리나 짚고 서 있는 이무기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진정해 황수현.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놈 말을 이리 덥석 믿으려고?'
"...좋아."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승낙의 말이었지만요.
젠장.
잠깐 맛 본 자유가 그리도 달더군요.
공룡이 말했습니다. "잘 생각했어." 누가 뱀 같은 놈 아니랄까 봐 웃는 꼬라지도 비릿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인간의 형상임에도 불구하고 뱀의 비늘마냥 차가운 손. 그 손을 꼭 잡고선 스스로에게 다짐했습니다.
절대 이 구렁이 같은 놈에게 흔들리지 않아야지. 이용할지언정 이용당하지는 말아야지.
십자가 앞에서 하기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맹세였다는 생각이 든 건 한참 뒤의 일이었네요.
20xx. 07. 14.
내가 처음에 당신에게 말하길, '유일한 친구'라 했던 것을 기억하나요? 귀신에게 저주받았다 소문난 아이에게 친구가 생길 리가 없었으니, 친구가 없다는 것은 거짓이 아닙니다.
인간에 한해서는요.
이십여 년간 귀신을 보는 삶을 살고 있자면, 아는 귀신이 한둘쯤은 생기기 마련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힘을 담았다며 공룡이 준 옥팔찌를 매만지면서 기도실에 앉아 있던 날, 안면이 있는 귀신이 내게 이리 말을 걸었습니다.
"걔 좀 멀리하면 안돼?"
나는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그 반투명한 존재를 바라보았습니다. 푸릇함과 희끗함이 오묘하게 섞여 있는 이상한 존재. 성당에 묶인 지박령 잠뜰이었습니다. 그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그 구렁이 자식, 잡귀만도 못한 것 같아서는 도통 마음에 안 든다고. 입을 삐쭉대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와 나는 이리 말했습니다.
"같은 귀신이잖아. 잘 좀 지내봐."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서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몇 번 달싹이다 곧 그만두었습니다. 예상컨대, 자신은 그런 잡귀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라고 뻔뻔스럽게 말하려 했겠죠.
지박령 잠뜰은 내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이 성당에 존재했던 영(靈)입니다. 영안에 보이는 희끄무레한 귀신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으나, 사시사철 성당 터에 묶여 살아가는 존재를 지박령 외에 달리 설명할 단어를 찾을 순 없어 대충 부르고 있네요. 설령 성당의 지박령이라는 게 얼핏 들어 웃기는 말일지라도요.
사실 잠뜰은 단순히 특이하다는 말로는 모자란 존재입니다. 웬만한 잡귀들은 발을 들이지도 못하던 성당에서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매일을 보낸다는 점 하며, 기도 못해 죽기라도 한 건지 매일 똑같은 시간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기도를 한다는 점이 그렇고요.
그 연유가 궁금했기에 매번 질문도 던져봤다만...
"귀신 주제에 기도는 왜 하는 거야?"
"고작 스무 해 남짓 산 우매한 인간이 이 깊은 뜻을 알 리가 없지."
돌아오는 건 혀를 참과 함께 들려오는 한심스럽다는 목소리 뿐이었네요.
원래부터 비범한 존재임은 어렴풋이 느꼈으나, 최근 들어 그가 생각보다 더 예사롭지 않은 존재인 게 느껴지곤 했습니다.
공룡의 힘을 받은 팔찌를 차고 있는 동안은 어떤 귀신도 수현의 곁에 접근할 수가 없었는데, 잠뜰은 용도 못 된 이무기 따위는 별 대수가 아니라는 양 뺀질나게 내 곁에 나타났으니까요. 뭐, 이 치마저 보이지 않았다면 심심했을테니... 퍽 잘된 일이라고 해둘까요.
잠뜰은 공룡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신성한 성당에 웬 이무기 같은 잡것이 들어왔냐는 둥, 온 곳에서 물비린내가 진동을 한다는 둥...
어디 그뿐일까요? 언젠가 둘이 대면이라도 했던 건지, 어느 날은 씩씩거리며 돌아와서는 어떻게 그리 후안무치한 놈이 다 있냐며 기도인지 저주인지 모를 무언가를 퍼붓기까지 하더군요. 솔직히... 고만고만한 놈들로 보이는지라 이 사태가 웃기기 그지없지만요.
서로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듯하지만 티격태격하는 게 생각보다 잘 어울리지 않나, 하고 생각하며 작게 웃었을 때였습니다. '있잖아 황수현.' 다른 날과 다를 바 없이 기도를 마친 잠뜰이 나를 불렀습니다.
"걔도 나도, 신이 아닌 이상 완전한 구원을 해줄 수 없어."
평소와 달리 사뭇 진지한 투의 말이었습니다.
"...나도 알아."
바보같이 목덜미만 긁으며 안다는 척 답을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어느 정도 바라고 있었습니다.
공룡이 나의 온전한 구원이 되어주기를.
한 번만, 정말 마지막으로 한 번만 타인에게 기대를 걸어보면 안 되는 걸까요? 자애롭게 웃고 있는 예수상 앞에서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기대를 건다면, 천벌이라도 받게 되는 걸까요?
신성모독과도 가까운 이 말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털어놓아 봅니다.
그 빛이 어둠에 비치니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1:5
20xx. 01. 06.
한동안은 일기를 못 썼네요. 이래저래 바쁜 나날들이기도 했고... 몸이 좀 안 좋았거든요.
무튼간, 그간 있었던 수많은 일들에 대해 서두를 어떻게 끊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이무기며 지박령이며... 별 이상한 존재들이랑 부대껴 살다 보니 일어나는 일도 많았거든요.
아무래도 공룡에게 꿍꿍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 일기는 이 말로 한번 시작해 보도록 하죠.
보통 무속과 기독교는 상반되는 속성이 아니던가요? 아무리 나 자신부터가 부적이며 염주며 십자가며 바리바리 싸 들고 다니는 종교 잡탕형 인간일지라도, 십자가를 가만히 바라보는 이무기라는 단어의 조합은 생소하기 그지없긴 하더군요.
공룡이 내게 옥팔찌를 준 지도 벌써 반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 그 시간 동안 공룡은 모든 미사에 빠짐없이 참석했습니다. 그렇다고 기도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앉아서 기싸움이라도 하는 양 예수상을 노려보다 가는 것 뿐이었고요.
"너네 신은 말이 참 많네."
여느 때처럼 미사가 끝난 뒤, 불쑥 튀어나온 공룡의 말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좋은 의미로 말한 거라기에는 날 서 있었고, 나쁜 의미로 말했다기에는 아리송했던 말. 나는 그에게 되물었습니다.
"말 많은 신이 싫은 거야?"
아니. 공룡은 부정의 답을 하곤 피식 웃었습니다.
"침묵하는 신보다야 낫지."
말을 뱉은 공룡은 어쩐지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구석에 있는 잠뜰에게로 날아가 괜히 시비를 걸어댔습니다. 이상했습니다. 대답을 할 때 공룡의 눈에는... 원망과 서러움이 뒤섞인, 무언가 날것의 감정이 들어있는 듯했거든요. 순간 일평생 귀신과 부대껴 살아온 내 촉이 발동했습니다.
저 자식, 뭔가 숨기는 게 있구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뺀질나게 성당을 드나드는 주제에 잠뜰처럼 기도를 하는 것도 아니고. 어딘가 한이 서린 양 예수상만 빤히 노려보다 가는 것 부터가.
그가 이질적으로 느껴진 건 이전에도 몇 번 있는 일이었습니다. 공룡이 대뜸 성당 지붕 위에 올라가 보지 않겠냐며 나를 끌고 갔던 날이었습니다. 위험하지 않냐 물으니, 떨어지기 전에 자기가 잡으면 된다고 하더군요. 이런 무책임한 보호 방식이 다 있나...
우리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성당 종소리는 멀리 퍼지고, 해는 천천히 기울고 있었고요. 지는 해와 함께 고요가 찾아왔습니다. 귀신들에게 시달리지 않는 침묵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고요. 이상하게도 그 고요가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넋을 놓고 고요를 즐기고 있는데, 공룡이 불쑥 묻더군요.
"왜 그렇게까지 버티고 살아?"
이 자식이 싸우자는 건가, 싶었습니다. 남은 지금 20여년 동안 온갖 망령들의 위협을 견뎌가며 겨우 살아내고 있는데 갑자기 대뜸 이런 소리라니. 확 짜증이 밀려와 그의 멱살이라도 잡을까 싶어 고개를 들었는데, 공룡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나를 놀리려고 하는 게 아닌, 마치 오랜 세월이 묵은 듯한 감정을 담은 눈동자. 그 눈을 봄에 이상하게도 말이 턱 걸렸습니다. 나는 더듬거리며 무심코 속 안에 있던 이야기까지 말해버렸습니다.
"...버틴다기보다는, 그냥 살아가는거지."
공룡의 눈길은 여전히 나를 향해있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을 이었던 것 같습니다.
"딱히 죽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살고 싶은 것도 아니고."
나한테 침묵하는 신한테는 이게 제일 큰 복수가 되지 않을까 해서... 그래서 살았던 게 여기까지 와버렸네. 내 입으로 말하면서도 참 성의 없는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겠나요? 내 인생이 원래 그랬는걸.
공룡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표정이 어딘가 서늘한 게 무섭기도 하여, 뻘쭘한 채 말을 걸지도 못하고 바람만 맞았던 것 같아요.
원래같으면 그 고요를 즐겼을 텐데, 노을과 함께 찾아왔던 그 순간의 고요는 불편하기만 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와서 왜인지 생각해 보니, 아마 신에게도 못한 말을 남에게 한 첫 순간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도란 본래 털어놓는 일이지 않습니까? 내게는 고해가 고백이 아니라 판결문 같았습니다. 분노했다고 하면 벌을 받을 것 같았고, 미워했다고 말하면 더 버려질 것 같아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모두에게 모범생 같은 말만 골라 입에 올렸던 겁니다.
그리고 이무기는, 그런 거짓말투성이였던 내 말들을 처음으로 진실되게 이해해주었던... 존재이고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그를 이상하다 생각했던 부분 말이예요. 천 년 묵은 이무기의 눈에서 내가 제대로 된 감정을 읽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나보다 몇십, 몇백 배는 더 오래 살아왔을 이무기의 속내를 재는 데 굳이 시간을 할애해야 할까요?
내가 생전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이 현재 존재합니다. 가위눌리지 않는 편안한 밤과 귓가를 메우던 수다스러운 소리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친구... 라고 하기엔 아직 낯간지러운 주변의 존재들까지.
그것들을 버리고 탐정 짓을 하기에는 아직까지 이 현실이 너무도 소중합니다.
까발려지든 실토하든, 언젠가는 밝혀지게 되겠지요?
그래서...
그래서 그런 것 뿐입니다.
절대, 회피하려는 게 아니라...
.
.
.
20xx. 01. 24.
그럼 그렇지.
나를 대가 없이 도와줄 리가.
나 자신을 뺀 그 누구도 믿지 말아야 했는데. (군데군데 젖어 번져있다.)
20xx. 02. 16.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다시 한번 생각하는 거지만, 당신이 다이어리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알 수 없는 말만 냅다 휘갈기고 잠적하다니... 나라도 나 같은 친구는 별로 두고 싶지 않을 것 같아 웃기기만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배신당했습니다. 공룡한테요.
이걸 배신이라고 해도 되는 거겠죠? 따지고 보면 사기당한 것에 조금 더 가깝긴한데... 느끼는 바는 배신감이 제일 크니 배신이라 이름 붙여보겠습니다.
요 며칠간 몸 상태가 그닥 좋지 못해 성당에 나가지를 못했습니다. 사실 그닥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도 뭐할 만큼 최악이었어요. 변명이라면 변명이지만... 일기를 쓰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고요.
침대에 누워 가만히 있으니 머리가 더 멍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주변에서 떠드는 귀신들 없이, 온전히 나 혼자만 남겨져 고요를 누리려니 퍽 어색하더군요.
아픈 몸을 일으켜 성당으로 향했습니다. 몸은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머리가 그 고요함을 참지 못해 꾸역꾸역 걸음을 옮겼어요. 성당에 도착하자, 예상대로 공룡과 잠뜰이 안에 있는지 문 안에서 대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던 참에, 잠뜰이 갑자기 화를 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벌써 반년째야. 언제 말할 건데?"
그렇게 말한 잠뜰은 공룡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말을 쏟아냈습니다. 니가 수현을 기만하는 걸, 대체 언제 고백할거냐는... 그런 말. 안 그래도 열감에 지끈거리는 머리가 잠뜰의 말을 들음에 더 아파왔습니다. 이용이니 사과니 이해니, 그런 단어들이 어지러이 얽히는 게 이해되지 않았달까요. 아니, 어쩌면 이해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비틀거리며 문을 열어젖힌 내가 소리쳤습니다.
"그게 무슨 미친 소리야?"
잠시 놀란 표정을 지은 공룡이 제 입술을 잘근거리더니 곧이어 차갑게 말하더군요.
"어디부터 엿들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들은 그대로야. 설마 내가 너 같은 인간한테 아무 대가 없이 도움만 줄 줄 알았던 거니? 순진하고 가엾게도."
앞서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몸이 좀 안 좋았다고.
나는 단순히 내가 몸살이 난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세상에. 그게 신기와 더불어 내 생명력이 깎여나가고 있다는 것의 증거라지 뭡니까? 이어졌던 공룡의 말들이 마음에 비수처럼 박혔습니다. 난 그를 향해 이리 물었습니다.
"사람 좋은 얼굴 하고 실실 웃더니, 어디까지가 거짓이었던 거야?"
뭐, 그딴 게 중요한 건 아니었지만요. 입을 벙긋대던 나는 한껏 체념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습니다. 두 번 다시는 내 눈에 띌 생각도 하지 말라고.
그리고는, 그가 준 옥팔찌를 빼서는 바닥에 세게 던졌습니다. 쨍강 소리를 내며 두 동강 난 팔찌에는 다시는 눈길도 주지 않았습니다.
근데 왜...
대체 왜, 네가 배신당한 것처럼 아픈 표정을 짓는지.
기껏해야 스무 해 산 인간 황수현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20xx. 02. 20.
인간이 참 간사합니다.
태어나길 죽음과 가까웠고 생에 대한 미련이 없다 스스로에게 말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었다는 걸 들으니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더군요. 죽음과 가까이 태어났다 해서 그게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난 죽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팔찌를 깨고 하루 뒤, 귀신같이도 아팠던 게 싹 가셨습니다. 그 자식에 대한 배신감이 얼마나 더 커졌을지 감이 오려나요? 팔찌를 깼는데도 마찬가지로 귀신들이 다가오지 않았던 건 의문스러웠지만, 그런걸 신경 쓸 만큼 내 마음이 여유 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공룡에 대한 분노로만 지난 며칠을 허비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배신당했다는 것보다 더 화가 나는 건...
공룡을 온전히 미워하지조차 못하는 내 자신.
그 자식이...
나한테 처음으로 친구 같은 걸 알려준 그 자식이,
나에게 희생을 요하며 용이 될 수 있게 해달라 읍소했더라면... 나는 고민하다 기꺼이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화가 납니다.
모기처럼 내 생명력을 빨아먹던 그가 무릎 꿇고 미안하다는 한마디만 했더라면... 그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였을 거라는 생각에 화가 납니다.
일평생을 외롭게 살아온 내게 친구가 무엇인지 알려준 그가 마냥 미워하기에는 소중해서. 그 정이라는 것 하나 때문에 증오한다 말할 수조차 없어져서...
그가 보여준 친절이 전부 거짓이었는데, 난 무얼 믿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삶에 대한 욕구와는 모순되게도, 살아가며 평생 공허를 느낄 것만 같은 이 기분은... 얼마의 시간이 지나야만 나아질 수 있는 걸까요?
그때에는 알지 못하되, 후에는 알리라.
-요한복음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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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이 준 팔찌를 던지고 성당을 나섰던 그날 이후, 집에 칩거하듯 누워있던 수현은 다시 성당을 나오는 것을 택했다. 가만히 누워 있는 것도 이젠 좀이 쑤셨을 뿐더러, 혼자 있으면 자꾸만 그날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수현은 성당 부지에 발을 디뎠다. 건물 외곽의 나무 사이를 걷고 있자, 저 멀리서 잠뜰이 날아오는 게 보였다. 수현의 앞에 다다른 잠뜰이 입을 열었다.
"오늘은 좀 늦었네."
잠뜰은 그날 일이 꿈이었다는 양 수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했다. 하기야, 공룡과 있었던 갈등에 괜히 제삼자인 잠뜰이 말을 얹어봤자 좋을 건 없겠지. 수현은 오히려 그런 잠뜰의 배려가 고마웠다.
이어지는 침묵이 괜히 멋쩍었던 수현이 입을 열었다.
"근데 너 말이야, 진짜 귀신은 맞아?
"갑자기 왜?"
"요즘 들어 귀신들이 하나도 안 보이는데, 너는 멀쩡히 보이길래."
농담 삼아 던진 말에 순간적으로 잠뜰의 얼굴이 굳었다. 잠뜰이 수현에게 취조하듯 물었다.
"...언제부터?"
갑작스레 심각해진 잠뜰의 얼굴에 당황한 수현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 글쎄. 한 사흘 됐나? 수현의 답에 불안한 표정을 지은 잠뜰이 급기야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너무 빠른데... 그 말을 뱉은 잠뜰이 스스로 놀란 표정을 짓는 것을 수현은 놓치지 않았다.
등골이 서늘했다. 공룡이 숨기는 게 있음을 처음 눈치챘을 때 발동했던 촉. 그 촉이 불안의 씨앗을 던졌고, 곧이어 생각하고 싶지 않은 불안감이 수현을 급습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한숨을 쉰 잠뜰이 눈치를 보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곤 입을 열었다. 마치, 누군가 말하지 말라 했던 비밀을 조심히 털어놓기라도 하는 것처럼.
잠뜰은 말했다. 사실 공룡은, 공룡 자신의 기운을 수현에게 넘겨주는 선택을 했다고. 그렇게 수현이 남들의 일상을 누릴 수 있게 도우려 했다고. 일부러 자신을 오해하게 만든 이유는, 수현이 결코 동의하지 않을 걸 알았기에 그랬다고...
"그럼... 그럼, 기운을 모두 넘겨주면 공룡은 어떻게 되는데?"
"소멸하겠지. 아마도."
수현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정말 순진하고 가여운 게 누군데. 수현의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을 빤히 보던 잠뜰이 다시 말을 했다.
"네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어차피 그 녀석의 신은 걔한테 침묵해서, 평생을 이무기로만 살았어야 할 운명이니까."
이렇게라도 너에게 도움을 준다니까... 잠뜰은 말을 이어갔지만, 수현의 귀에는 그 무엇도 들리지 않았다. 신이 침묵해서, 일평생을 한 존재로만 살아야 하는, 용이 되지 못할 이무기. 몇 천년을 더 살아도, 무슨 노력을 하더라도 하늘이 침묵한다면...
"...잔인하잖아."
수현이 순간적으로 말을 툭 내뱉었다. 거기에 헛웃음을 지은 잠뜰이 말했다.
"어떻게 너나 걔나 하는 말이 똑같냐."
무슨 뜻이냐 채 묻기도 전, 왜인지 진지한 표정을 지은 잠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희생이 걔의 선택인데, 존중하지 않을 거야?"
그 말을 들은 수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난 그딴 희생 바라지도 않았어."
웃음으로 표정을 푼 잠뜰이 입을 열었다. 그래. 이래야 내가 봐 온 황수현이지. 잠뜰은 수현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었다. 옥팔찌였다. 깨졌던 모양대로 금이 가 있긴 했지만, 단단히 붙어있는. 이게 어떻게... 수현의 의문 서린 얼굴에 그는 어깨를 으쓱하곤 입을 열었다.
공룡은 성당에 있을 거야. 잠뜰의 말이 전부 끝나기도 전, 수현은 온 힘을 다해 성당으로 내달렸다. 미련하고 바보 같은 치를 위해 흘려줄 눈물 따윈 없어서, 뜨거운 눈시울은 애써 외면한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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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최종적 목표가 정해져 있는 영생의 영물에게 있어 삶이란 지루함의 연속일 뿐이다. 설렁설렁 기도하고, 미적대며 여의주 모으고. 부지런함과는 영 거리가 멀었던 삶에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요깃거리라곤 머리통 굴려 하는 생각뿐.
그래, 그 빌어먹을 생각들이 이 모든 일의 화근일지니.
신의 은총을 받아야만 목표를 이룩할 수 있는 존재에게 의심이란 감히 허용될 수조차 없다. 이무기란 본래 하늘이 허락해야만 승천할 수 있는 존재. 그 말인즉슨, 제아무리 능력이 출중할지여도 하늘이 허락하지 않으면 기약 없는 기다림을 지새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변과 다르게 미적대던 게 성에 차지 않았던 건지, 몇백 년에 걸쳐 다 모은 여의주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침묵했다. 오직 공룡에게만.
침묵은 거절보다 잔인했다. 직접적인 거절이 아닌 고로 기대를 꺼뜨릴 수 없다는 것. 그렇게 남은 일말의 가능성이 평생을 따라다니며 괴롭혀온다.
무릇 사고가 가능한 존재라면 거듭되는 실패 끝에 의문을 품는 것은 당연하지 않던가? 그렇기에 공룡은 그만 생각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하늘은 정말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대체 왜 침묵하고 있는지를.
응답이 영원히 없는 하늘에게 피조물은 복수를 계획했다. 억겁의 시간 동안 쌓인 한을 어떻게 하면 쏟아낼 수 있으려나 고민하던 때에, 나와 닮아보이는 누군가가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기대를 품지 않는 눈.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끝내 믿지는 않는 눈.
침묵에 시달리는 또 다른 존재에 소름이 돋았다. 저 애의 신기를, 생명력을 이용한다면... 그걸 모조리 빨아들인 다음 내 한 몸을 불살라 신에게 날린다면, 그것보다 더한 엿이 어디있겠는가!
계획 자체는 완벽했다. 다만 예상치 못했던 건, 한이 서릴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정을 줄 수도 있다는 존재라는 점.
공룡은 생각보다 쉽게 수현에게 정을 줬다. 그것은 공룡이 한을 쌓았던 억겁의 시간 만큼 외로웠던 탓이리라. 죽어도 상관없다던 수현의 눈에서 공룡은 살아남고 싶다는 불씨를 엿봤다. 생각보다 질긴 인간이었다. 무너졌을 상황에도 무너지지 않고, 원망치도, 누군가를 저주하지도 않는 단단한 심지의 인간.
마치, 오래전의 나처럼.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우습게도, 나는 그 애를 이용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 불씨를 꺼뜨리는 존재가 되는 일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신을 의심했던 순간부터, 넌 이미 글렀어.언젠가 성당에 매여 있는 영, 아니 어쩌면 신에 가장 가까울 작자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싸가지 하고는. 신을 가장 닮은 자의 잔인한 통보를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헛웃음이 났다.
잠뜰에게 건넨 말을 아직 기억한다. 일부러 가만히 있었지 않느냐고. 내가, 그 애를 위해 스스로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게.
"잔인하네."
잠뜰은 그 말에 어깨를 으쓱이더니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칭찬으로 받을게."
공룡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은 뒤 예수상을 보았다. 지는 노을빛이 유리창으로 들어와 색색의 빛을 내는 게 퍽 성스러워 보인다.
심호흡을 한 그는 잠뜰에게 말했다. 인간의 몸으로 영물의 힘을 받는 일이니, 아플거야. 아마 오해도 하겠지. 하지만 나는 그 오해를 풀 생각이 없으니, 분노를 노잣돈 삼아 가겠노라고. 그 말에도 잠뜰은 언제나처럼 덤덤한 얼굴이었다. 하여간, 신이랑 관련된 작자는 다 싸가지가 없다니까.
거절보다 잔인한 침묵.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성실했던 것은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 인간들도 이미 용이 된 이무기들도 아닌,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하늘일지도 모르겠다.
침묵이 응답이라면, 하늘은 이미 충분히 답했을지니. 끝끝내 불리지 않은 이름을 몇백 년이나 붙들고 있을 이유는 없겠지.
너에게 일상을 선물할 테니,
너는 있는 힘껏 살아 줘
생의 첫 친구에게 남길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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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간만에 느껴보는 해방감과 절박함. 그 두 가지가 모순적으로 뒤섞였다. 아까 잠뜰과 잠시간 나눈 대화는 도무지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수현은 기도실의 문을 세차게 열어젖혔다. 해가 지는 시간이라 그런지, 산 너머로 넘어가는 노란 햇빛이 스테인드글라스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공룡은 그 가운데에서 불량한 자세로 단상에 기대어있었다.
마치, 수현과 공룡이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수현은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붙들고는 공룡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까이서 본 그는 전보다 훨씬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손목의 팔찌를 매만지며 걸음을 옮기던 수현은, 곧 공룡의 눈길이 제 팔찌로 향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마주한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도 않은 채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다. 한참의 침묵 끝에, 수현이 물기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네가 없는 일상보다 네가 있는 평범하지 않은 나날들이 더 좋아."
그러니까, 이런거 다 집어 치우고. 살아가면 안돼? 나랑 잠뜰이랑 같이... 셋이서 떠들며 살아가면 안되냐고. 눈물을 참는 게 버거워 수현은 한 자 한 자를 짓씹듯 내뱉었다. 단상에 기대 있던 공룡은 그 말에 옅게 웃더니 힘겨운 듯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난 네가 평범하게 살아갔으면 좋겠어."
안녕. 내 처음이자 마지막 친구야. 제멋대로 나타났던 공룡은 갈 때도 제멋대로라는 양 수현의 손을 꼭 잡고는 제 기운을 전부 나눠주곤 사라졌다.
수현의 세상이 완벽히 고요해졌다. 공기 중 섞인 물 비린내가 아니었더라면, 이 모든 걸 꿈이라고 착각할 만큼.
생각보다 싱거운 작별에 어쩐지 짠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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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xx. 07. 18.
오랜만입니다. 그간 많은 일이 있어서 차마 무언가를 쓸 생각을 못했네요.
사실 당신을 다시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맨 앞에서 말했듯, 이건 솔직하지 못한 나 자신을 털어놓는 일종의 고해성사니까요.
그렇기에 오늘 쓰는 건 단순한 일기가 아닌 작별 인사입니다.
나는 내 친구 덕에 조용한 일상을 갖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상한 놈들의 소리에 밤낮없이 시달렸는데, 이젠 그 일들이 모두 전생 같다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이전, 귀신들에게 시달렸던 때의 어두침침한 분위기가 사라져서일까요. 주변엔 새로운 이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밤새워 놀아도 보고, 같이 술에도 취해 보고, 마음속 이야기들을 진솔하게 털어놓아도 볼 수 있는 이들이 말이죠.
성당에는 계속 다니고 있습니다. 이제 갈 이유는 없지만... 수년간의 습관을 무시할 수는 없더군요. 물론, 이렇게라도 가서 떠난 이를 생각해 주지 않는 것도 도리가 아닌 것 같아서도 있지만요.
온갖 귀신들에게서 해방된 것이 무색하게도 잠뜰은 아직 그대로입니다. 조용한 인생을 갖게 된 지 딱 사흘째가 되던 날, 없어지지 않는 잠뜰의 모습에 당황해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지만...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 하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하더군요.
"그야 난, 애초에 네가 벗어날 대상이 아니니까."
헛소리 같은 말에 벙찐 날 본 잠뜰은 킥킥대더니 곧 평소와 같이 앉아 기도를 했습니다. (지금도 꾸준히 기도를 하는 건 변하지 않았고요) 하여간, 성격 이상한 건 잘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 한 번 말했듯, 사람은 참 간사한 존재입니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치던 지옥이었는데, 막상 사라지고 나니 그 일부를 그리워하게 된다는 게.
벌써 여름입니다.
비 냄새를 맡을 때면 그의 생각을 합니다. 친숙한 물의 냄새가 공기 중에 만연한 장마 시기에는 더더욱. 그렇기에 비가 오는 날이면 괜히 창문을 열어둡니다. 집 안까지 스며드는 물 냄새가 싫지 않아서요.
아직도 가끔은 성당 문을 열 때마다 생각합니다.
단상에 기대 서서, 건방지게 웃고 있는 네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가 이 글을 본다면, 분명 혀를 차겠지요.
나는 여전히 미련하고, 여전히 어리석으며, 여전히 인간다운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아가 보려 합니다.
잊는 것이 아니라, 추억을 묻어둔 채로.
내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해 준 친구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나의 또 다른 친구였던 당신에게 전하는 이야기도 이만 끝맺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했습니다.
